피고 지는 벚꽃 아래에서 보낸 다시 오지 않을 오늘

김남희의 여행의 일상
글과 사진 김남희

피고 지는 벚꽃 아래에서 보낸 다시 오지 않을 오늘

한 조각 꽃이 져도 봄볕이 깎이거늘 / 바람 불어 만 조각 흩어지니 시름 어이 견디랴 / 스러지는 꽃잎 내 눈을 스치는 걸 바라보노라면 / 몸 상할 술이나마 머금는 일 마다하랴

해마다 봄꽃이 필 때면 두보의 <곡강이수>를 읊으며 꽃나무 아래를 걷는다. 4월 초의 교토에서 나는 다시 이 시를 떠올렸다. 교토로 날아올 때 내가 원한 건 하나뿐이었다. 꽃 핀 벚나무 아래 세월이 다 가도록 앉아 있는 것. 오직 벚꽃을 보겠다고 열흘의 여정을 꾸렸으니 꽤나 사치스러운 여행이었다. 아라시야마 근처의 친구 집에 머물며 열흘 내내 벚꽃을 보러 다녔다. 만개한 벚꽃 아래 서 있으면 마음이 일렁였다. 그러니까 그건 일종의 슬픔 같았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슬픔은 아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얇고 희미한 슬픔이랄까. 피었나 싶으면 눈처럼 떨어져 내리는 벚꽃은 덧없는 인생을 상기시켰다. 벚꽃 앞에서는 일본인들도 “하카나이 진세이(덧없는 인생)!”라고 중얼거리게 된다는데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교토는 온통 희끗희끗한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느 시인의 시구(詩句)처럼 연분홍의 시절이었다. 그 연분홍 아래 기모노를 차려입은 연인들이 있었다. 벚꽃은 모두의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걸까. 가모 강변을 지나 마루야마 공원으로 향하던 길에서 내 귀에 들려온 건 서투른 일본어에 실린 마음 한 자락이었다. “아이싯떼루(사랑해요)”라고 고백하는 외국인 남자의 떨리는 목소리. 엿듣게 된 게 괜스레 미안해져 달아나느라 그녀의 대답은 놓치고 말았지만 벚나무 아래 나 혼자 얼굴을 붉힌 채 서 있었다. 벚꽃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내일 같은 건 생각지도 말고 오늘을 살아야 할 것 같은, 인생을 한껏 탕진해도 될 것 같은 그런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힘.

 

폐 끼치는 일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이 나라 사람들이 유일하게 인간미를 발휘하는 때가 이 무렵이다. 벚나무 아래 돗자리를 펴고 ‘하나미(꽃놀이)’를 즐기던 일본인들이 점점 목소리가 커지고, 반듯하던 자세가 흐트러지고, 마침내는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술에 취해 잠들기도 한다. 그 모습이 재밌어 나는 해 질 무렵이면 일부러 마루야마 공원에 들르곤 했다. 그날도 공원에는 하나미를 즐기는 이들로 빈자리가 없었다. 문득 돌아가지 말까, 통장의 얼마 안 되는 돈을 마지막까지 살뜰히 써버리고 내일은 모르는 순진한 아이처럼 살아버릴까 싶어졌다. 써야 하는 원고며, 꾸려야 할 생활이며, 이런 것 따위는 다 잊어버리고 이대로 팔자 좋은 여자처럼 마냥 늘어지면 안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던 저녁, 제주에서 지인의 부고가 들려왔다. 아직 40대 중반의 그녀가 사라진 세상이 눈앞에 있었다. ‘아, 살아서 저 벚꽃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마음 같은 거 재지도 말고, 사랑한다는 표현도 아끼지 않고, 포옹 같은 건 시도 때도 없이 나누면서,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사랑하며 살아야겠구나. 오늘 세상을 떠난 이의 몫까지 그래야겠구나.’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 며칠 후, 지인의 생전장(生前葬), ‘리빙 퓨너널(Living Funeral)’이 열렸다. 나의 스승이자 벗인 쓰지 신이치 선생님의 친형 고이치 선생님의 생전장이었다. 악성 림프종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고이치 선생님이 가까운 이들과 함께 삶을 정리하는 자리였다. 정원에 매달린 티베트의 기도 깃발 룽타가 부드럽게 펄럭였다. 고이치 선생님은 ‘Happy Death Day’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우리를 맞았다. 병색이 짙어 예전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지만 따스한 미소와 유머 감각은 여전하셨다. 물기 어린 두 눈 가득 웃음을 머금은 그는 “오늘은 죽기에 좋은 날입니다”라며 인사를 건넸다. 선생님의 어머니는 11년 전, 벚꽃 피던 봄날에 친구와 가족을 불러 모아 이틀간 웃고 노래하며 꽃놀이를 즐긴 후 세상을 떠나셨다. “완벽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고이치 선생님도 그렇게 이 세상과 작별하고 싶어 했다. 자신이 직접 지은 집에서 사랑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여서. 기력이 더 쇠하기 전에 가족과 친구들에게 삶이라는 기적에 함께 해줘서 고마웠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우리는 돌아가며 고이치 선생님과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울고 웃었다. 모두가 조금씩 준비해온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와인이나 차를 마셨다. 눈물보다는 웃음이 몇 배나 풍성한 자리였다. 조카 부부가, 딸과 사위가, 친구들이 고이치 선생님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날 형제가 답가로 준비한 노래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살다>에 나오는 ‘곤돌라 송’이었다.

 

인생은 짧아요 / 사랑을 하세요 아가씨 / 붉은 립스틱이 희미해지기 전에 / 심장의 뜨거운 피가 식기 전에 / 내일이라 불리는 날은 없어요 / 인생은 짧아요 / 사랑을 하세요 아가씨 / 검은 머리가 바래기 전에 / 마음의 불꽃이 꺼지기 전에 / 오늘이라 불리는 날은 다시 오지 않아요

다시 오지 않을 오늘, 다시는 들을 수 없을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 자리는 고이치 선생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한 선물이었다. 인생이,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당신의 사위어가는 생명으로 전해주는 선물. 창밖으로 벚꽃이 흩날리며 지고 있었다. 마지막 인사를 드릴 때 선생님은 야윈 팔로 나를 꼭 끌어안으셨다. “남희가 와줘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기만 했다. 고이치 선생님과 헤어진 후 교토 외곽에 사는 친구 카오리를 찾아갔다. 오사카의 생활을 접고 산간 마을로 귀농한 지 벌써 5년째. 3년 정도 빈 농가를 빌려 살던 그녀가 대지 150평의 50년 된 농가를 2천만 원에 사들였다.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부엌이나 화장실의 타일도 손수 붙이고, 옛집에서 재활용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살려 2년에 걸쳐 집을 고쳤다. 그렇게 고쳐진 집은 근사했다. 어떻게 도시 생활을 접고 혼자 산골로 들어올 생각을 했느냐는 내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연과 흙이었어. 나는 늘 흙을 만지며 살고 싶었거든. 더 늦기 전에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 싶어 이 마을로 들어왔지.” 그런 삶을 꿈꾸면서도 혼자 산골로 들어갈 용기가 없어 미루기만 하는 나로서는 그녀의 용기가 부럽기만 했다. 다음 날 그녀의 애인과 마을 친구까지 넷이서 벚나무가 줄지어 늘어선 근처의 강변으로 하나미를 하러 갔다. 카오리가 천연발효종으로 구운 빵에 텃밭에서 키운 야채와 들판의 꽃들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점심을 배부르게 먹은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나란히 누워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을 말없이 지켜봤다. 맑은 새소리만이 가끔씩 들려올 뿐 사위는 평화로운 고요함에 젖어 있었다. 봄날의 바람과 햇살과 벚꽃 향기가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스며들었다. ‘더 늦기 전에’. 카오리의 그 한 단어가 고이치 선생님의 모습과 함께 겹쳐졌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이와 곧 세상을 떠날 이를 생각하던 열흘 내내 벚꽃이 피고 지고 있었다. 죽음이 삶 속으로 자연스레 흘러들어 왔고 삶이 죽음으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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