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이 피었다 진 들꽃들의 노래

부엉이 극장
글 전영석

이름 없이 피었다 진 들꽃들의 노래

영화 <더 와이프>

얼마나 많은 꽃들이 보는 이 없이 피었다가 사막의 바람 속에 달콤함을 잃어가는가 토머스 그레이 <시골 묘지에서 쓴 비가(悲歌)>

 

몰락한 가문에서 태어난 여자가 있다. 그녀가 재능이 넘치고 아름답다면 그녀의 이야기는 비극이 될 확률이 높다. 잘못된 시대에 태어나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타고난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고 사라진 사막의 들꽃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녀에게는 여러 개의 이름이 있다.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 <센스 앤 센서빌리티>의 마리안, <서프러제트>의 모드 와츠와 에멀린 팽크허스트, <조용한 열정>의 에밀리 디킨슨…. 1960년대 <히든 피겨스>의 실존 인물들(캐서린 존슨, 도로시 본, 메리 잭슨)은 심지어 흑인 여성이라는 두 가지 족쇄에 맞서 싸웠다. 남성들이 지배하던 콘크리트 세상에는 크고 작은 균열이 생겼고, 여권 신장을 위해 싸웠던 선구자들의 희생과 열정 덕분에 유리 천장은 낮아졌다. 21세기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라는 걸출한 여전사를 배출했지만 그녀의 고군분투를 다루고 있는 영화에서 아직도 자유․평등․진보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차별이 존재한다는 반증이다. 긴즈버그 대법관의 입을 빌려 부활한 1837년 세라 그림케의 발언, ‘여성에게 특혜를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형제들에게 하려는 부탁은 우리 목을 밟은 발을 치워달라는 것뿐입니다’는 여전히 유효하다. 차별의 망령은 사라지지 않고 동시대 우리 사회 곳곳에 기생하고 있다.

영화 <더 와이프>는 ‘The Writer’의 길을 가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The Wife’의 역할 놀이를 선택한 ‘유령 작가(Ghost Writer) 조안 아처’의 이야기다. 조안은 천재적 재능을 가졌지만 1960년대의 억압적 시대 상황 속에서 여자로 태어났다는 원죄(冤罪) 때문에 작가가 되고 싶은 욕망을 스스로 포기한다. 대신 조안은 자신의 이루지 못한 욕망을 삼류작가인 남편 조셉 캐슬먼에게 투사한다. 조셉은 1960년대 미국 사회가 원했던 백인, 유대인, 젊고 매력적인 남성 작가라는 조건을 두루 갖추었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가 빠진 인물이다. 그에게 없는 단 한 가지는 아내 조안이 갖고 있는 문학적 재능뿐이다. 그래도 조셉 캐슬먼은 뉴욕의 주류 문화를 좌지우지하는 문화 권력자들에게 전략적 선택을 받는다. 서평을 쓰고 출판사를 운영하고 문예지를 펴내는 사람들, 대중이 어떤 작가에게 주목하게 만들지, 누굴 칭송하게 할지 결정하는 사람들. 남성/지배계층이라는 기득권 세력의 선택에 ‘여성 작가’가 낄 자리는 없다. 조안은 자기 이름(정체성)을 버리고 남편 조셉의 외형적 자산이 짙게 드리운 그림자 뒤에 ‘작가의 아내’라는 가면을 뒤집어쓴 채 숨죽이며 살아왔다. 조안은 자신의 직업을 ‘킹메이커’라고 소개한다. 여자이기 때문에 한 사람의 작가로 인정받을 수 없었던 그녀는 그렇게 유령 작가로 살았다. 두 사람의 부도덕한 공모와 협업 속에는 시대와 구조의 뒤틀린 욕망이 깔려 있다.

‘유령 작가’를 다룬 영화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유령 작가>가 정치적 음모에 휘말린 대필작가 고스트의 미스터리 스릴러라면, <트럼보>는 1950년대 매카시즘의 광풍에 휩쓸렸던 시나리오 작가 달튼 트럼보의 눈물겨운 유령 작가 생존기다. 유사한 소재와 장르적 장치를 걷어내고 보면 이 이야기들은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 목소리는 ‘자기 이름’을 찾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 자리에 <콜레트>의 이야기가 포개진다. 영화 <콜레트>가 대필 작가로서 잃어버렸던 자기 이름을 찾아가는 실존 인물 콜레트의 투쟁과 성취를 따라가는 자아 찾기 성장담의 1부라면, <더 와이프>는 후일담 혹은 2부라 할 수 있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콜레트가 처했던 당대의 부조리한 현실은 조안의 시대에도 변함이 없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기만과 억압은 오히려 더 교묘해졌다. ‘목줄을 느슨히 맸다고 목줄을 안 맨 건 아니지’라는 <콜레트> 속 미시의 지적은 <더 와이프>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남편 조셉의 착취와 위선으로 진화한다. 조안의 선택은 이타적 배려와 사랑을 위한 희생 같지만 그것은 자발적 사육에 가깝다. 오랜 시간 숨어서 글을 쓰며 자신의 재능을 갈아 넣어 남편 조셉의 노벨문학상 수상 신화를 만들었지만 조안에게 돌아온 것은 남편의 외도와 무시뿐이고, 세상의 존경과 찬사는 속물에 꼭두각시인 조셉의 몫이 된다. “켄터키 더비 경마가 끝나면 말이 상을 받을 것 같나?”라는 <이스케이프 룸>의 대사가 조안의 처지를 환기시킨다. 장기판 위의 말은 언제든 다른 것으로 대체가 가능한 소모품일 뿐이다. 극의 진행과 함께 배신감, 분노, 공허로 가득 찬 채 균열을 일으키며 무너져가는 조안의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이 지독한 블랙코미디의 끝에서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해진다.

영화 <그린 북>의 실존 인물 돈 셜리 박사는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 자기 방식으로 싸웠지만, 조안은 ‘작가라면 글을 써야 한다’는 신념을 버리고 ‘작가라면 글이 읽혀야 한다’는 현실과 타협한다. 4번의 플래시백 장면을 통해 현재를 구축하게 된 과거의 진실이 조금씩 드러나면서 인물들의 관계가 균열을 일으키며 서서히 침몰하는 과정이 묵직하게 묘사된다. 플롯의 밀도나 연출의 재미보다 주인공 글렌 클로즈의 얼굴 클로즈업 장면이 보여주는 갈등과 긴장감이 월등하다. 글렌 클로즈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오랜 세월 응어리진 분노를 폭발시킨다. 그녀의 연기는 뻔한 거짓말(조셉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조차)도 진실처럼 믿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영화가 끝났을 때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묻고 싶었다. 1960년 뉴욕, 유명 출판사 편집회의 장면에서 여성 작가 이야기가 나왔을 때 편집자들이 던진 첫 질문은 ‘미인이야?’였다. 지금은 과연 얼마나 바뀌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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