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과 실험과 과학

서민의 세상時 나침반
글 서민

와인과 실험과 과학

공주에 있는 고등학교 학생이 연락을 했다. ‘기생충 관련 실험을 한 뒤 학교 학술제에서 발표를 하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느냐’는 취지였다. 흔쾌히 수락했다. 물론 그건 성가신 일이었다. 학생들이 할 만한 일을 찾고, 또 그들을 지도해야 하니까 말이다. 게다가 다섯 명이나 되는, 한창 잘 먹을 학생들에게 밥까지 사줘야 한다! 그들 중 한 명이 말했다. 다른 교수들에게도 연락을 많이 했는데 도와주겠다는 사람이 없었다고. 이렇게 답했다. “우리나라는 연구시설 대부분이 대학에 있어요. 그런데 대학에서 일하면서 과학실험을 하겠다는 학생들을 외면하는 건 직무유기죠.” 그들과 난 야생 쥐를 잡아 그 안에 있는 기생충을 꺼내는 일을 했다. 덕분에 그들은 학술제에서 멋진 발표를 했으나 아쉬운 점도 있었다. 학생들은 자신이 한 일이 논문으로 만들어지기를 희망했지만 논문으로 내기엔 결과가 부족했다.

 

그다음에 또 다른 학생이 부탁을 했다. 그와 난 철새에서 기생충을 꺼내는 일을 했다. 철새는 기생충의 보고로, 수십 종의 기생충이 그 안에 산다. 우리나라에서 철새 연구를 한 이는 거의 없었는데 다행히 새 전문가를 만난 덕분에 철새 몇 마리를 구했고, 그 학생과 더불어 기생충을 원 없이 꺼냈다. 그들 중 일부는 우리나라에서 한 번도 보고되지 않은 신종이었다. 철새의 기생충이 해산물을 통해 해안가 주민들에게 전달된다는 점에서 이건 논문으로 쓸 가치가 있었다. 난 그 학생을 공저자로 올렸다. 그 이듬해에는 족제비의 몸에서 기생충을 꺼냈고 그 일을 한 학생도 저자로 만들어줬다. 기생충학을 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이, 위에서 한 일들은 고교생이 하기에 전혀 어렵지 않았고 또 논문으로 쓸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교 때 저자의 경험을 한 이들이라면, 나중에 조금이라도 과학연구에 관심을 갖지 않겠는가?’ 안타깝게도 고교생과 같이 하는 연구는 그게 마지막이 됐다. 방송에 나가게 되면서 내 연구를 하기도 벅차게 됐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게 꼭 안타까운 일은 아니었다. 2018년, 교육부가 미성년자가 저자에 포함된 논문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논문의 존재가 수시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전에 쓴 논문 두 편이 문제가 됐다. 나중에 알아보니 저자에 포함된 애들은 원하는 대학에 다 떨어졌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몇 달간 수차례 학교에 불려 다니고 수차례 사유서를 작성하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다. ‘앞으로는 쓸데없이 남을 돕지 말아야겠다.’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에는 러시아 혁명 후 백작이 식당에서 와인을 시키려다 황당한 경험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웨이터가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이었다. “오늘 저녁에 선택할 수 있는 와인은 두 가지뿐입니다.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 중에서 골라야 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직원에게 캐물은 백작은 결국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낸다. 식당의 와인 저장고에 있는, 1만 병 가까운 와인의 라벨이 다 떼어져 있었던 것이다. 어이없어하는 백작에게 직원이 설명한다. “와인 목록이 존재하는 것은 혁명의 이상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며 이의를 제기한 이가 있었습니다. 이제 앞으로는 모든 와인을 레드 와인, 화이트 와인으로만 구분해 단일한 가격으로 판매할 것입니다.”

소아마비 백신을 만든 소크(Jonathan Salk), DDT라는 살충제를 만든 파울 밀러(Paul Muller) 등 역사에 족적을 남긴 위대한 과학자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과학에 관심을 갖고 실험을 한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분야와 달리 과학은 이런 소수가 이끌어가는 곳이다. 대학 입시에 짓눌린 학교 교육이 과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상황에서, 시간을 투자해 과학연구를 하겠다는 학생들의 의지를 교육부가 꺾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이들의 다양하고 개성 있는 라벨을 다 떼어내 똑같이 만들려는 사회에서 과학 발전은 불가능하다. 우리나라가 앞으로도 과학 강국이 되기 어려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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