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진 김구

한 장의 사진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글 표학렬
사진 제공 인문서원

쓰러진 김구

사진은 김구 암살 직후 김구를 관통한 총알이 뚫고 나간 창과 그 밖에서 통곡하는 민중들의 모습이다. 김구 장례식은 10일 동안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100만 명 이상이 조문하고 수십만 명이 장례식에 참가했다. 김구는 분단 전후 남측의 통일 염원을 대변했고 그 죽음은 통일에 대한 절망의 시작이었기에 민중의 슬픔은 깊고 한스러웠다.

 

1945년 11월, 김구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이래 2년 동안 보여준 모습은 실망스러웠다. 김구와 임정 세력이 주축이 된 한국독립당(한독당)은 해방 전 보여준 폭넓은 좌우 통합보다는 헤게모니에 집착하는 폐쇄적 정치세력의 전형적 모습이었다. 그래서 지주 세력을 기반으로 하는 한민당이나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이승만의 틈새에서 이렇다 할 정치력을 보이지 못했다. 이 시기 가장 큰 김구의 실책은 반탁운동에 지나치게 집착한 것이었다. 신탁통치는 미국의 제안을 소련이 수락한 것으로,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 사항 중 하나였다. 1945년 12월 28일 발표한 결정 사항은 다음 세 가지였다.

 

  1.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2.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 개최한다.
  3. 4개국 신탁통치는 5년 이내로 하며 임시정부와 협의해 결정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4개국이 5년 동안 신탁통치를 하며, 이는 소련이 한반도 공산화를 위해 주장한 것으로 미국은 반대했다’고 알려졌다. 신탁통치 내용에 분노한 우익 진영의 총궐기가 29일부터 폭발했다. 특히 김구는 국민에게 반탁 투쟁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주장했다. 좌익 진영이 3상 결정 사항은 임시정부 수립이 핵심이라며 결정 사항을 지지하자, 이를 찬탁이자 매국으로 규정했다. 이로써 독립운동의 방법론에 지나지 않던 좌익과 우익의 갈등이 애국과 매국, 아군과 적군의 개념으로 발전했다. 결국 찬탁과 반탁의 갈등이 분단의 실질적인 시작이었던 셈이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1946년 5월, 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6월부터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바로 ‘정읍 발언(6.3)’이다. 이에 별다른 이견을 보이지 않던 김구는 6월 11일, ‘이승만 박사께 복종하기를 맹세합시다’라고 외쳤다. 김구는 이승만과 보조를 맞추며 1947년까지 반탁 투쟁을 주도했다.

그러나 유엔이 소총회에서 남한만의 총선과 정부 수립을 결정하자 김구는 단독정부 반대 입장을 비로소 명확히 했다. 김구는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글에서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해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그리고 1948년 북측 연안파의 지도자 김두봉에게 남북 지도자 회의를 제안했다. 김두봉은 김구가 충칭 임정 시절(1940~1945년) 좌우 연합을 위해 긴밀히 접촉했던 인물이었다. 북은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제안해왔다. 양측은 밀사를 보내 서로 이견을 조정해 4월 평양에서 남북협상을 하기로 합의했다.

김구의 남북협상에 대한 내외의 비난과 냉소는 엄청났다. 미 군정은 김구가 착각하고 있다고 비판했고, 이승만은 대세를 모른다고 비판했다. 일부 학생단체는 몰려와 김구의 집인 경교장을 막고 길에 드러눕기도 했다. 북에서도 아직 ‘살인강도단 두목 이승만, 김구’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하지만 김구는 석탄 투입구를 통해 경교장 후원으로 빠져 비서와 아들만을 데리고 북행길에 올랐다.

김구는 김일성과의 담판을 원했고, 마침내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4자 회담이 열렸다. 이 회의에서 남북 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 단정 반대, 외국군 철수, 남북의 통일에 반대하는 모든 무질서 행위 금지 등을 합의했다. 이는 현재 평화통일의 3대 원칙인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원형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결국 김구의 남북협상은 오늘날 남북대화와 평화통일의 기초를 닦은 것이다.

그러나 분단은 막지 못했다. 남과 북 모두 이미 정부 수립을 위한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김구는 북이 제안한 2차 남북협상을 거부하고 남한 단정 수립 참여도 거부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 총선은 한독당 등이 불참한 가운데 어수선하게 치러졌다.

5․10 총선 결과 한민당이 참패하고 무소속이 약진했다. 이에 이승만은 사실상 한민당과 결별하고 무소속과 자신의 친위 세력을 중심으로 정부를 수립했다. 그리고 반대파에 대한 잔혹한 숙청이 시작됐다. 제주 4․3에서 시작한 ‘아군이 아니면 모두 적이고 빨갱이’라는 논리가 10월 18일, 여수․순천 사건(여순사건, 제주 진압을 위해 여수에서 대기 중이던 14연대가 일으킨 반란 사건)을 계기로 육지에 상륙했다.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이 공포돼 1949년 한 해 동안 무려 11만 명이나 좌익 혐의로 체포됐다. 국회가 반민특위를 가동해 친일파 처벌을 시도했으나 정부는 이들도 빨갱이로 규정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김구도 무사하기 어려웠다. 일찍이 남북협상 당시 ‘김구를 크레믈린궁의 신자라고 규정하지 아니할 수 없음(한민당 관계자들)’이라고 비판한 데 이어 여순 사건이 일어나자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이범석은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몰락한 극우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서 벌인 정치적 음모’라고 비난했다. ‘대통령은 신성이다. 절대로 순응하라. (친일파) 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다’라는 주장이 버젓이 뿌려지는 세상에서 이승만과 친일파에 반기를 든 독립운동의 거두 김구가 어찌 무사하겠는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습격당하고 특위 위원이 줄줄이 간첩으로 잡혀가던 6월, 26일 아침에 김구는 자신을 찾아온 육군 소위 안두희가 쏜 총에 얼굴을 맞고 절명했다. 안두희는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곧 풀려나 현역으로 복귀한 뒤 예편해서 사업가로 승승장구했다. 김구의 장례식은 수많은 국민의 애도 속에 치러졌지만 그의 임정과 한독당은 재기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4․3에서 비롯된 적에 대한 증오와 폭력은 이미 이승만 체제에 만연해 있었고 그 칼날은 남북협상 때부터 김구에게 겨눠져 있었다. 김구 암살 배후는 바로 이승만 시대 그 자체였다. 그리고 한반도 전체에 흐르던 폭력의 광기는 한국전쟁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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