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후퇴할 때도 있지만, 결국, 역사는 앞으로 나아간다

마이 홀릭 라이프
인터뷰 신영배
사진 긴수염, 환경재단


때로는 후퇴할 때도 있지만, 결국, 역사는 앞으로 나아간다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한성민

한국 근대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고, 현재 대전대학교에 학생들에게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는 한성민 교수와 나는, 78일간의 피스앤그린보트 항해 동안 같은 객실을 사용하는 룸메이트였다. 출항 전, 그와 같은 방을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나는 그와의 인터뷰를 신청하고 승선했다. 최근 개봉했던 <극한직업>의 한 대사를 인용하자면, ‘이것은 다행인가, 불행인가.’ 사실 인터뷰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때로는 인터뷰이와 적당한 거리와 긴장감을 유지하는 게 좋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학창 시절부터 역사 과목을 가장 좋아했고, 줄곧 역사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나는, 선내에서 그를 볼 때마다 그러니까 잠결이든, 강연중이든, 취중이든 평소 궁금했던 역사 관련 질문들을 끊임없이 그에게 쏟아냈다. 귀찮을 법도 한데 한성민 교수는 언제나 내 얕은 질문에 명료하고 이해하기 쉽게 답을 해주었다. 또한, 호탕한 성격의 그는, 역사 이외의 인문학 및 다른 주제들에 관해서도 지나치게(?) 박학다식해 항해하는 동안 나는 그로부터 많은 지식과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평화와 환경을 위한 우리들의 항해가 마무리되어 가는 즈음, 나는 제대로 된 인터뷰를 위해 그와 마주 앉았다. 한성민 교수는 내게, “아직도 내게 더 물어볼 게 있느냐?”며 혀를 내둘렀다. 그렇다. 이번 한성민 교수와의 인터뷰는, 인터뷰라기보다 어찌 보면 그와 내가 78일간 나눈 역사에 대한 대화에 더 가깝다.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는 것

피스앤그린보트에 승선한 지 며칠의 시간이 흘렀어요. 그간의 소감이 궁금해요.

이제 항해가 마무리되어 가고 있는데요,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승선하길 잘한 것 같아요.(웃음) 한일 양국의 약 1,100명의 시민과 한배에 올라타서 대화하고 만날 수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좋았어요. 몸은 좀 고되지만, 그 피곤함을 상쇄하는 뜻깊은 항해였다고 생각해요.

 

교수님께선 강연자로 한일 양국의 시민들 앞에서 대담 및 강연도 했지만, 한 명의 참가자로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강연이나 인물이 있었나요?

오키나와 청년들이 승선해 현재 오키나와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군기지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 가장 인상 깊었어요. 그 강연을 들은 후, 한국을 비롯해 미군기지가 있는 아시아 모든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미군 (범죄) 문제가 유사하게 발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미군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각 국가가 고립적으로 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그 친구들의 간절한 호소에 한일 양국의 참가자들이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는데요, 한국 참가자들의 경우, 오키나와 미군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해결할지 그 해결 방안에 집중해 질문했다면, 일본 참가자 중에는 오키나와 청년들의 승선 이유의 순수성을 되묻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전 그런 모습에 놀랐고, 동시에 오키나와는 일본 사회에서 아직도 내부 식민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더욱이 오키나와 청년들의 호소가 절감되었고, 그 모습이 인상적으로 다가왔어요.

 

올해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해입니다. 역사학자로서 그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올 것 같아요.

50주년, 100주년이라는 숫자가 완결성을 갖기 때문에 뭔가 새로운 고민을 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해요. 또 당연히 다시 한 번 점검해야 하는 면도 있구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으로 인해 요즘 사회적으로나 학계에서도 관심이 상당히 고조돼 있어요. 사실, 100주년이라는 의미 때문이라도 많은 대중이 관심 가져주면 좋을 것 같아요. 우리 주변엔 이런 관심조차 받지 못하고 지나가는 주제나 분야들이 너무 많으니까요. 이런 걸 고려하면 역사학은 그나마 이런 시기성 때문이라도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죠. 또 이를 통해 그동안 역사학자들이 그들의 시선으로 고민해오던 연구 성과들을 발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지기도 하니까요.

 

피스앤그린보트에 승선하기 전, 한 역사 교수가 ‘3.1운동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한 동시에 봉건제도로부터의 해방, 계급해방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혁명이라 할 수 있다’라는 인터뷰를 봤어요. 이에 관해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건 좀 무리한 주장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식으로 평가한다면 개항 이후 민중이 무언가 움직임을 보인 건 전부 혁명이라고 봐야 하고, 그럼 혁명이 너무 일반화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혁명이란 건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의 기초나 사회, 경제, 조직을 근본적으로 뒤엎는 일이고, 혁명이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시스템을 바꾸거나 최소한 정권이라도 바뀌어야 해요. 저는 우리나라가 혁명이라고 하는 용어를 너무 긍정적으로 확대해석하는 부분이 분명 있다고 생각해요. 3.1운동 이후 두드러진 사회 변화를 꼽자면 여성이 사회적으로 새롭게 등장했다는 정도를 들 수 있어요. 3.1운동 이후 발생한 여러 성과 중 여성의 사회적 진출은 주목할 만 한 사안이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꾸준히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은 늘어나고 있었고, 그것만으로 3.1운동을 혁명이라고 명명하기엔 부족해요. 즉, 정치 권력이 바뀌지 않았고, 신분제가 해방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토지개혁조차 벌어지지 않았죠. 그렇기 때문에 저는 개인적으로 3.1운동을 혁명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한 면이 있다고 봐요.

교수님처럼 그런 소신을 가진 학자들이 소위 ‘국뽕(국수주의나 민족주의가 심하며 타민족에 배타적이고 자국만이 최고라고 여기는 행위나 사람)’에 심취한 사람들에게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하잖아요.(웃음)

학자가 기본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할 때 명철한 판단과 신념을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비난받을 것이 두려워 소신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또 모르죠. 아직은 그런 일을 당해보지 않았고, 겁이 없어서 더욱 제 이야기를 소신껏 하고 있어요.(웃음)

 

덧붙여 질문하자면 박유하 교수 <제국의 위안부>를 맹비난 하는 사람들을 겨냥해서 ‘학문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일단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는 안 읽었어요. 같은 연구자로서 학문의 자유라는 것은 반드시 지켜져야 할 중요한 문제지만, 모든 주장과 연구를 학문의 자유라고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해요. 박유하 교수가 자신의 연구를 ‘학문의 자유’라고 스스로 주장하고 있지만, 자유민주주의 사회라고 해서 사람을 죽이거나 범죄를 저지를 자유까지 있는 게 아닌 것처럼, 박유하 교수의 주장이 과연 합당한가를 고민해봤을 때, 저는 그녀의 주장이 피해자들한테 새로운 형태의 2차 가해 혹은 살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질적인 생명만 죽이는 것만 살인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왜 언론에서 역사학자들에게 ‘박유하 교수의 책을 읽었느냐, 안 읽었냐’ 묻거나 혹은 ‘박유하 교수의 주장을 인정하면 학문의 자유이고, 그렇지 않으면 학문의 자유가 아닌가’ 식의 이분법으로 몰아가고 부추기는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에도 수많은 역사책이 출간되고 있어요. 그럼 대중들이 그 책들의 내용을 보며 알아서 옥석을 가릴 것이고, 개인적으로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 같은 경우 자연스럽게 기억 속에 묻힐 책이라고 보는데, 자꾸 언론에서 부각시키기 때문에 자꾸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 같아요.

 

소위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역사 중, 유독 우리 근대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대학 시절, 처음 일본으로 배낭여행을 갔어요. 당시에는 관광 비자를 보름밖에 받을 수 없어서 후쿠오카에서부터 도쿄까지 일본 국토의 절반만 종단했는데요, 그때 경험한 일본의 모습이 제게는 충격으로 다가왔어요. 우리 어린 시절만 하더라도 ‘한국과 일본은 다르다’라고 교육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실제 마주한 일본의 모습은 한국과 너무 닮아 있더라구요. 옛 시절에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문화가 전파되었지만, 그 시절만 하더라도 일본의 앞선 문화나 제품들이 한국에 많이 전파되고 영향을 준 게 확실해 보였는데, 국내에는 반일 감정과 적개심이 상당했죠. 반대로 일본에서 만난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들은 한국이란 나라를 잘 모르더라구요. 이 간극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생기는 것인지 너무 궁금했어요. 그리고 또 하나, 풀리지 않는 한일 역사 문제의 기원이라고 하는 게 결국, 근대에 있고 현재도 해결되지 않은 채 반복되고 있잖아요. 그러면서 한일 양국 모두 어느 한 세력은 이런 사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고, 계속 이런 상황이 지속되는 건 곤란하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던 시기였는데요, ‘대학원을 진학한다면 근대 한일 관계에 관해서 공부해야겠다’라고 그때 다짐했어요.

현대 한국의 경제․정치 성장의 원동력을 일제 식민지 시대에서 찾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의 주장을 인정하긴 싫지만, 일정 부분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어서 혼란스러울 때가 있어요.

기본적으로 일제 식민지 시절 형성된 철도든 무엇이든 그것은 근대의 산물인데, 거기에 근대성이 전무하다고 이야기할 순 없어요. 그런데 그것들이 ‘우리나라의 성장에 절대적인 영향을 줬다’라고 말하면 곤란해요. 그 안에 항상 식민성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고 저는 생각해요. 예를 들어 철도의 경우, 그 레일을 설치한 자의 의도가 가장 크게 작용한다는 것이죠. 철도가 설치되면 많은 사람이 오가고, 그 철도를 이용해 물자와 정보 이동이 촉진되고, 시장의 범위가 넓어지는 등 다양한 근대적 효과가 발생했지만, 그를 통해 가장 큰 이득을 얻는 자는 누구였는지를 봐야 해요. 바로 철도 레일을 설치한 일본 정부인 것이죠. 이런 철도를 근대의 산물로만 인식하는 건 협소한 생각이에요. 식민성과 근대성이 동시에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 식민성이라고 하는 큰 틀 속에서 근대성이 일부 존재하는 것이지, 근대성이 그 본질을 좌우할 순 없어요.

 

결국, 역사는 앞으로 나아간다

이번 피스앤그린보트 항해를 통해 군함도(하시마섬)에 다녀오셨어요. 어떠셨나요?

우선 명확히 해야 할 게 많은 사람이 군함도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사진으로 보는 군함도 내 아파트 및 건물들은 세계문화유산이 아니에요. 일본 정부가 ‘산업혁명 유산’ 시기를 1910년까지로 제안했기 때문에 군함도의 세계문화유산은 메이지 시기의 갱 터와 방파제 유구만 해당해요. 그런데 마치 군함도 전체가 산업유산인 양 소개하고 있어요. 일본이 1910년으로 그 시기를 제안하는 이유는, 근대를 1945년까지로 규정하면 강제징용 및 강제노동이 쟁점으로 부상하다 보니 그 명칭과 기간을 메이지 시대로 제한한 것이에요. 사실, 이번 군함도 체험은 일본이 보여주고 싶은 부분들만 보고 끝나서 군함도를 다녀왔다는 의미만 있지, 제대로 봤다는 느낌은 없어요. 군함도가 강제징용과 강제노동을 놓고 봤을 때 어렵고 힘든 곳이 분명하지만, 그보다 더한 곳들도 많이 있어요. 우리가 아직 모를 뿐이죠. 저는 이런 부분을 지속적으로 찾고 연구해 일본 정부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실질적인 행동이 선행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모든 국민이 군함도에만 너무 집중하다 보면 다른 부분들이 소외되는 일이 발생하니까요. 군함도를 통해 우리 국민의 대중적 감정과 정서를 자극하는 것만으로 아무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이런 모습은 단지 우리의 자기만족과 위로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유네스코에서 군함도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시 ‘군함도가 생성된 후 폐광할 때까지의 전 기간을 사람들에게 공개하라’고 권고했다고 알고 있는데, 1850~1910년까지의 모습만 임의적으로 보여주고 있고, 시설 유산도 일부만 공개하고 있어요. 또 조선인 강제 노동에 대한 설명이나 정보센터가 전혀 설치돼 있지 않구요.

간단해요. 그걸 모두 공개하면 스스로 범죄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행하지 않는 거예요. 이는 결국, 아베 총리가 할아버지의 잘못과 부정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현실적으로 만약 한국이 일본보다 국력이 세진다면 이 한일 근대사 문제는 굉장히 쉽게 풀릴 거예요. 그러나 이것 역시 일본 정부의 또 다른 굴복에 불과하지, 진심으로 사과하고 반성하는 것은 아니에요. 일각에서는 억울하면 우리의 국력을 강화하자는 말을 쉽게 하는 데 이 역시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구요. 그렇지만 우리는 포기할 수 없고, 매듭지어야 할 것은 명확히 매듭을 지어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어요. 잘못된 관계가 아직 풀리지 않았는데 새로운 관계는 결코 맺어질 수 없어요.

선내에서 교수님과 룸메이트를 하면서 ‘한일 간의 미래를 준비하는데 있어 우선적으로 선행되어야 할 것은 제대로 된 과거사 청산이다’란 주제로 잠깐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잖아요. 이에 관해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과거는 잊고 새로 시작하자’는 이야기는, 과거와 단절하자는 이야기인데, 그게 가능하려면 과거를 기억하는 모든 이가 사라져야 해요. 그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단절이란 존재할 수 없고, 과거사를 해결하려는 노력과 해결되어 가는 모습이 전무한 상태에서 새로운 관계란 존재할 수 없어요. 미래에 다음 세대가 등장해도 지난 과거사 정리가 되지 않았다면, 현재의 한일관계와 비슷한 양상의 모습이 펼쳐질 것이고, 이를 고민하다 보면 결국 그 원인은 과거에 있기 때문에 일본 정부에게 계속 문제를 제기하게 돼 있어요. 일본 정부도 이런 사실을 인식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부분이 있어요. 또 다른 시각에서 한국 국민이 바라보는 일본은 너무 집단화되어 있어요. 일본 내에도 굉장히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해요. 일본 정부가 다르고, 일본 사회가 다르고, 일본의 여론과 국민의 의견도 각각 다른 측면이 있는데, 우리는 흔히 ‘일본이 그렇게 한다’라고 표현하죠. 그 주체가 불분명하고 모호하기 때문에,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도 불분명해지는 거예요. 보다 명확하게 ‘일본 정부’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고, 일본 정부에서도 핵심 세력에게 우선적으로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책임의 소재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의 근대사 중 특히 관심이 가는 사건이나 영역은 없었나요?

‘우리나라가 왜 망하게 됐는가’에 관심이 많았어요. 우리는 어릴 적부터 ‘반만년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지닌 민족’이라고 배웠는데, 소위 국력이 강한 서방국가의 침략이 아닌, 우리보다 문화 수준이 낮다고 생각해온 일본에게 나라가 망했잖아요. 그 이유가 큰 관심을 끌었어요. 그만큼 우리나라 자체가 부패해 있었던 것이죠. 한 나라가 망할 때 단지 외부의 힘이 커서 망하는 경우는 드물어요. 거대 제국인 당나라에 여러 번 맞서며 나라를 지킨 고구려처럼 아무리 외부의 힘이 강하다고 해도 나라를 지켜낸 많은 예가 우리에게 있으니까요. 한 나라가 망할 때 외부의 힘을 고정변수라고 한다면, 그 내부의 사정, 그러니까 내부의 부패로 인해 국가 체계가 무너져 있고, 제대로 작동되지 않을 때 그때 나라가 망하는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교수님이 생각하는 우리 역사의 한 장면은 언제인가요?

제가 생각했을 때 굉장히 억울하다고 느껴지는 한 장면은,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나라에서 좌우가 대립을 시작하는 그날, 그것이 외세의 개입을 막지 못하고 결국, 우리가 분단의 아픔을 겪게 된 가장 큰 요인이라고 생각해요. 우리의 운명을 외세에게 넘겨버리게 되는 그날을 한 장면으로 꼽고 싶어요. 해방 후, 1945년, 미국과 소련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안을 발표했는데요, 당시 동아일보는 결정안이 발표도 되기 전, ‘소련이 신탁통치를, 미국이 즉시 독립을’이라는 제목으로 신탁통치 문제를 크게 부각시킨 왜곡 기사를 보도했어요. 신탁통치란 또 다른 형태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이 보도를 본 대중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죠. 당시 우익들은 이 동아일보의 기사를 이용해 대대적인 반탁운동을 벌이면서 이를 지지하는 세력은 매국노라며 비난하며 반소련, 반공의 형태로 몰아갔어요. 모스크바 삼상회의 전 신탁통치를 먼저 제안한 나라는 미국이었는데 그것을 소련으로, 결정안의 핵심 내용도 임시정부 수립에서 신탁통치 문제로 왜곡해 보도한 것이죠. 저는 그 동아일보의 왜곡 보도가 정말 용서가 안 돼요.

 

외세에 의해 나라가 분단되는 슬픈 역사가 발생했지만, 다행히 요즘 극적으로 남북이 화해 국면을 맞이했어요. 이를 바라보는 교수님의 생각이 궁금해요.

지금 그 질문을 들으니까 우리 역사의 한 장으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손잡고 군사분계선을 서로 오갔던 그 한 장면을 꼽고 싶어요.(웃음) 이 기회를 잘 살려서 최소한 전쟁의 위기가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남북이 서로 안정적이어야 새로운 생각과 시도를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것이고, 결정적으로 통일까지 가면 더더욱 좋겠지만,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전쟁의 위험을 제거하고, 실질적인 섬나라의 고립감을 해소함과 동시에 남북문제가 다른 국가의 영향을 통해서가 아닌 우리 손으로 직접 해결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면 좋겠어요.

 

결국, 한일문제나 남북문제 개선을 위해선 평범한 시민들의 교류가 중요하다고 보는데요,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한일문제나 남북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국민 스스로가 인식을 개선하지 않으면 영원히 풀 수 없어요. 또 민간 교류 확대를 통해 우리가 서로 동일한 존재이고, 차이가 없다는 걸 국민 스스로가 느끼면 이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예를 동독과 서독이 보여주고 있잖아요. 베를린 장벽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었던 건 이미 동독과 서독의 국민 간에, 우리는 차이가 없고 통일을 염원한다는 걸 서로 이해하고 공감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그런 이해가 실질적으로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고, 국가 간에 합의를 통한 선언문을 아무리 발표해도 절대다수인 국민의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고 교류가 없다면 진정한 화해나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선 후의 계획이 궁금해요.

일단 그간 밀린 일들을 처리해야죠.(웃음) 한 가지 생각 중인 건, 정치, 경제, 외교, 역사 문제를 딱딱하게 다루는 게 아니라 색다른 소재를 접목해 쉽게 풀어나가는 연구 방법을 택하고 싶어요. 예를 들어 식량의 문제를 놓고 보자면 식량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놓고 최초의 권력이 발생했어요. 이 잉여 농산물은 부족했던 시기도 있고 늘어났던 시기도 있는데요, 일본군의 경우 군량이 부족해 병사가 사망하기도 했고, 이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서 무모하게 전쟁을 확대하기도 했어요. 즉, 일본의 침략정책을 이야기할 때 식량이라는 하나의 소재를 선택해 접근하면 좀 다른 방식의 연구나 이야기 진행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시 말해 한국뿐만 아니라 떼려야 뗄 수 없는 한국, 일본 관계를 천편일률적인 시각이 아닌, 실질적인 삶의 문제들을 대입해서 연구해보고 싶어요.

 

한성민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강의전담교수 및 문학박사. 근대 이후 극명하게 다른 길을 간 한국과 일본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근대 한일관계사 및 동아시아 국제관계사를 연구하고 있다. 대립의 한일관계, 갈등의 동아시아를 넘어, 평화의 동아시아 공동체를 지향하며 주요 논문으로는, <구라치 데츠키치(倉知鐵吉)한국병합계획 입안과 활동>, <일본정부의 안중근 재판 개입과 그 불법성>, <2회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特使)에 대한 일본의 대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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