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병쟁이 내 사내

김민정의 세상 어디에나 詩
글 김민정

폐병쟁이 내 사내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꼴 갖춰 밤 어두운 길에서 만났더라면 지레 도망질이라도 쳤을 터이지만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속 같아서 내라도 턱하니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어주고 싶었네

산가시내 되어 독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 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 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어디 내 사내뿐이랴

 

시인 | 허수경
시집 |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실천문학사, 1988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이 시집을 참 오랜만에 꺼내 들었다. 언니야. 면지를 보니까 거기에 ‘1995년 12월 27일 대한서림에서 아빠가’라고 특유의 내 연필 흘림체가 쏟아져 있다. 언니야. 이런 흔적이 있어 그해 그 겨울날 사람으로 북적북적했을 인천의 그 서점(서울로 치면 광화문 교보문고 같은 데야, 언니야)에서 아빠를 만나 이 시집을 사달라고 졸랐었겠구나, 그걸 기억해낸다. 언니야. 그렇게 추억이란 내 손에 의지하지 않으면 내 것으로 내 몫으로 피는 유일한 내 꽃이 아니겠구나, 새삼 그걸 깨닫는다. 언니야. 손이 있어 시를 썼고 손이 있어 시를 읽었고 그렇게 시를 알게 한 두 손이 있어 서로에게 편지를 쓰고 서로의 편지를 읽게 했을 거니. 언니야, 우리 둘 사이를 오간 것이 마음보다 손이었으랴 한다. 언니야. 그래, 그 손……. 맞잡은 것이 언제였더라. 언니 손의 차가움이, 언니 손의 거침이 더는 내게 전해지지 않고 닿지 않게 된 지난가을에서부터 겨울 지나 오늘까지 시간은 무슨 회오리에 힘입어 이리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건지 모르겠다. 언니야. 벌써 완연한 봄인 거다. 언니야. 언니 봄 참 좋아했는데, 나는 언니가 봄을 못 이겨 몸으로 쓴 봄의 시들을 참 좋아했는데, 그 시들에 취한 어느 봄에 나는 언니에게 삐뚤빼뚤 이런 편지를 다 써서 부치기도 했는데, 독일로 띄운 그 편지의 한 대목을 언니가 이메일에 적어 보내줘서 나도 내 편지를 가질 수 있게 되었는데, 이랬지, 아마. “대낮에 막걸리 몇 통을 비웠는지……. 거나하게 취해서는 구두 양손에 들고 맨발로 아파트 14층까지 계단을 걸었어요……. 휘청휘청 현기증 짚기 허적허적 허방 딛기……. 살이 오른 꽃들에 허리 휘는 가지처럼 유연한 몸의 곡선을 섬기고 싶은데 그걸 모르겠어서 그저 눈물만 났던 오늘……. 지겹다는 느낌이 슬픔인 걸 알아버린 오늘……. 언니가 멀리 있어 언니에게 부릴 수 있는 엄살……. 언니가 가까이 있으면 내게만 부리고 말았을 몸살……. 언니는 왜 내게 슬픔을 온몸으로 입어라 해서 이렇게 날 슬프게 할까…….” 딱히 힘에 부치는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봄이어서 봄인 탓에 언니에게 부렸을 투정, 그건 다 언니가 가르쳐줘서 내 안에 허용하게 된 말줄임표 때문이라고 떼를 쓴 적도 그러고 보면 있었다, 언니야. 마침표라는 땅, 쉼표라는 하늘, 그 사이에 온전치 못한 우리니까 해보다 아니면 말든가, 만나보고 아니면 헤어지든가 할 수 있는 능동의 자유로움이, 그 천진이 우리를 시인이게 하는 걸 거라고 맘껏 찍게 했던 점점점 여섯 개……. 그 못다 한 말은 다음 시에 다른 시로 또 쓰면 된다고, 사내도 사랑도 그런 게 아니겠냐며, 뜨겁던 국밥을 호호 불어 먹던 언니의 목소리와 언니의 얼굴이 절로 떠오르는 지금이다, 언니야. 스물 갓 넘은 가시내였던 내가 안 아프고 더 가진 사내에게 진국의 국밥을 얻어먹고 있을 적에, 스물 갓 넘은 가시내였던 언니가 더 아프고 더 못 가진 사내에게 진국의 국밥을 고아먹이고 있는 장면을 어떤 식당 하나를 머리에 그려놓고 나로 하여금 그 안에서 재현하게도 하는 언니다. 언니야, 어린 언니는 왜 이렇게 일찌감치 어른이고 엄마였을까. 그래서 훌쩍 가기도 잘 간 거겠지, 언니야. 여한이 없으니 지금껏 꿈에도 한번 안 와주는 거겠지, 언니야. “어디 내 사내뿐이랴.” 그러게, 언니야. 언니가 품고 살았고 영원히 품고 살 그 무언가는 내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는 어떤 무한이겠지, 언니야. ‘선한 물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누웠다 일어나려 지금 물 끓인다. 언니야. 물 끓는 소리 오늘따라 왜 이리 끓을까. 언니야. 언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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