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과 평화통일의 꿈

한 장의 사진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글 표학렬
사진 제공 인문 서원

조봉암과 평화통일의 꿈

사진은 조봉암이 이승만 정부에서 농림부 장관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모습이다. 일제강점기 시대 조선공산당의 대표자였던 인물이 전향하여 이승만 정부에 참여하였을 때 그 충격은 가히 핵폭탄급이었다. 하지만 이후 그의 삶이 대한민국에 끼친 영향은 이보다 더욱 강력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1954년 미국을 방문하여 공산당에 대한 선제공격, 3차 대전을 주장하는 망발을 했다. ‘호전적인 전쟁광’이라는 이미지를 세계에 심으려 한 이유는 바로 북진통일이 그의 권력을 지켜줄 핵심 이데올로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국민을 전시체제로 묶음으로서 정권에 대한 반대를 억눌렀다.

그 한 사례를 살펴보면, 이승만 정부는 산아제한이란 이름으로 통용되던 출산 조절 운동을 반대했다. 70만 명에 달하는 국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들, 즉 남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반면 출산 조절을 혼외 성관계를 의미하는 타락한 성 윤리의 표출로 몰아붙였다.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론은 한반도 긴장 완화를 원하는 미국의 정책 기조와도 충돌했다. 이런 속에서 미 극우세력을 부추기는 이승만의 발언은 미국 정부와 의회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 말기로 갈수록 원조가 줄어들고 특히 국군 현대화에 미국이 비협조적으로 나온 것은 이런 측면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북진통일에 대한 질주를 멈추게 할 브레이크가 필요한 시대였다. 하지만 당시 야당인 민주당은 그럴 능력이 없었다. 제주 4.3을 유례없는 학살로 진압한 조병옥이나 친일파로 분단에 앞장선 장면이 지도자로 있는 민주당도 그 호전성이나 경직성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둠과 절망을 뚫고 나온 새로운 지도자는 조봉암이었다. 조봉암은 전쟁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진보정치를 들고 나왔다. 그의 진보정치는 자유와 평화로서, 당시 한국 국민을 ‘피해대중’이라고 규정했다. 좌와 우의 이념 대결에서 소외된 존재라고 본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 민족을 위해 먼저 어떠한 독재도 배격한 민주정치, 국민을 착취하지 않는 대중 경제 그리고 평화통일을 주장했다.

 

1956년은 대통령 선거의 해였다. 4월에 시작한 선거운동 분위기는 민주당 신익희가 휩쓸었다. 민의는 정권교체로 쏠렸다. 그런데 5월 5일, 덜컥 신익희가 뇌일혈로 죽고 말았다. 이제 민심은 신익희 대신 진보당 조봉암에게 쏠렸다. 그러나 민주당은 신익희에게 추모 표를 던져달라며 조봉암에 대한 지지를 명백히 거부했다. 심지어 김준연 고문은 ‘용공(容共)분자 조봉암에게 표를 던지느니 차라리 이승만에게 투표하라’고 해서 물의를 일으켰다.

대선 개표결과 이승만은 505만 표, 전체 70%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조봉암도 무려 216만 표를 얻어 그의 대중적 지지와 정권교체에 대한 민심을 보여주었다. 이로써 진보당과 조봉암은 이승만 장기 집권의 가장 강력한 적으로 떠올랐다.

이승만은 차기 집권을 위해 조봉암 제거 계획을 세웠다. 마침내 1958년 1월, 조봉암 등 진보당 지도부를 간첩 혐의로 전격 체포하였다. 조봉암의 혐의는 북한의 평화통일 주장에 동조하여 적화통일을 꾀했다는 것이었다. 평화통일은 유엔과 미국에서 한반도 통일방안으로 유력하게 언급하는 방안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을 위협하는 어떠한 주장도 용공(容共)으로 취급되었던 시절이다. 검찰은 ‘양명산이 북한 공작금을 조봉암에게 전달했다’며 간첩으로 옭아맸다. 하지만 조봉암은 양명산이 개인 사업으로 번 돈을 정치자금으로 제공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1심 재판부는 조봉암의 간첩 혐의를 무죄로 판결했다. 그런데 검찰의 항고로 열린 2심 재판부는 무조건 조봉암을 간첩으로 판결했다. 양명산이 ‘특무대의 강요로 거짓 진술했다’며 진술을 번복했음에도 양명산의 1심 때 진술을 그대로 증거로 채택한 정치 재판이었다.

 

조봉암은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고 곧 서대문 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산화됐다. 1959년 7월,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미국이 강력히 항의하자 자유당 2인자 이기붕이 사형을 막겠다는 약속까지 했는데도 형이 집행되었다. 누구의 의지인지 분명한 사건이었다. 유족은 너무 억울한 나머지 이렇게 심정을 토로했다.

“억울한 일이 일어나면 벼락이 친다던데, 이 여름에 벼락도 안 쳐. 하늘도 없는 게야.”

그렇게 억울한 조봉암 사건에 대해 1958년 민주당과 대선 때의 200만 지지자는 아무도 일어서지 않았다. 민주당이야 유력한 라이벌이 제거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대선 때 조봉암을 찍어준 이들은 왜 침묵했을까?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낯설지 않다. 북한과 연결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민족 전체에 흐르는 침묵은 1992년 민중당 사건 때, 2013년 통진당 사건 때도 항상 흘렀다. 분단과 한국전쟁의 트라우마는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똬리 틀고 있는 것이다.

조봉암의 진보정치는 전쟁 위협으로부터 국민을 구하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보편적 정의를 실천하는 운동이었으며, 북진통일을 통해 정권을 유지하려던 이승만에게는 치명적 타격이었다. 이승만은 친미로 집권했지만, 정권을 위한 북진통일 주장으로 오히려 미국과의 사이를 점점 벌어지게 했고, 오히려 조봉암의 주장이 한미동맹을 더 안정적으로 유지토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국이 그의 사형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결국, 4.19 혁명으로 민심은 폭발했고 미국은 이승만을 외면했다. 이승만은 4월 26일, 미국의 4.19 시위 지지를 통보받고 결국 하야하고 말았다.

김구는 일생 반공을 외쳤지만, 분단을 눈앞에 두고 남북협상에 나섰다. 그의 신념은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져야 땅 위의 38선이 철폐된다’는 것이었다. 마음속의 38선이 조봉암을 죽이고 이승만마저 불행하게 했다. 그러나 조봉암의 꿈은 아직도 진행 중이며, 우리는 그때처럼 평화롭고 자유로운 세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표학렬의 조봉암 선생 관련 내용은 인문서원에서 출간한 <한 컷 현대사>에 좀 더 자세히 수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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