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시스템은 달라질 수 있을까?

부엉이 극장
글 전영석

자본주의 시스템은 달라질 수 있을까?
다큐멘터리 영화 <길모퉁이가게>

아이들은 실수하면서 배운(자란)다. 아이냐, 성인이냐의 여부는 독립적이냐, 그렇지 않느냐로 결정된다. 정신적 자립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요건은 경제적 독립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길모퉁이가게>는 한국의 교육 시스템을 거부한 청년들과 그들의 경제적 자립을 지원하는 사회적 기업 <소풍가는 고양이>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 ‘청년’과 ‘경제적 자립’의 문제는 사라지고 도시락 배달 업체 <소풍가는 고양이>의 대표 ‘씩씩이(박진숙)’의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고민만 남아 아이들 이야기 사이를 유령처럼 배회한다. 73분이 지나고 영화가 끝나도 영화가 던진 질문은 끝나지 않는다. 1) ‘홍아’와 ‘원주’는 어떻게 됐을까?, 2) 우리는 과연 브레이크가 망가진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멈출 수 있을까?

​<길모퉁이가게>는 ‘사회적 기업에 관심이 1도 없었던’ 이숙경 감독이, 친구 ‘씩씩이’가 운영하는 사회적 기업 <소풍가는 고양이>의 4년여(2014년부터 2017년까지) 시간과 그 시간을 통과하며 변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여과 없이 따라간 영화다. 2017년, 창업 후 처음으로 연 매출 5천만 원을 달성했다는 드라마(갈등)의 정점에서 영화는 환호나 감동 대신 컨베이어 시스템(자본주의 구조)과 톱니바퀴(청년 노동자)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한 상황을 보여주며 갑자기 끝이 난다. 사회적 기업의 성공 미담(해피 엔딩)을 거부하고, ‘기-승-전-급 하강’의 열린 구조를 택한 결말은 <인간극장> 류의 감동을 기대했던 관객들을 한없이 불편하게 만든다. 영화가 남긴 긴 여운은 시계 제로의 암울함과 설명되지 않은 불안함으로 채워진다. 다양한 삶의 무늬를 지닌 채 존중받아야 할 인격체들이 기계의 부품으로 숙련되는(전락하는) 동안, ‘길모퉁이가게’가 ‘피도 눈물도 없는(?) 기업’이 돼가는 동안, 적자생존의 정글에 부려진 아이들은 운명 앞에 굴복하는 고대 비극 속 영웅들처럼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절벽 앞에서 절망한다. 영화 속에 기록된 아이들의 변화는 ‘성장’이 아니라 어쩌면 ‘파국’일지도 모르겠다.​

<길모퉁이가게>는 영화보다 영화에 담긴 현실이 도드라지는 영화다. 이숙경 감독은 GV 답변을 통해 ‘인물을 따라가지 않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지만, 관객 입장에서 흥미를 느끼는 드라마의 재미는 결국 영화 속 캐릭터(홍아, 쫑, 매미, 원주, 씩씩이) 사이의 갈등과 변화에서 나온다. 편집은 시간과 관계의 경험이 쌓여가면서 자연스레 생겨난 고민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간다. 관찰자 입장에서 서술자의 개입을 최소화한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같은 다큐멘터리 영화와 달리, <길모퉁이가게>는 화면 바깥에서 화면 안으로 난입해 들어오며 질문하는 감독의 보이스오버를 통해 3인칭과 1인칭 관점이 뒤섞인 혼돈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그것이 이 영화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이숙경 감독이 GV에서 밝힌 대로, ‘친구의 고민과 질문을 영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사회적인 논제로 만들어 함께 나누고 싶어서’ <길모퉁이가게>를 만든 것이라면 그 목적은 120% 달성했다고 생각한다. <길모퉁이가게>는 결론이나 대안의 영화가 아니라 ‘과정’과 ‘미완성’의 영화다. 영화 속 모든 인물(심지어 ‘씩씩이’마저도)은 미생(未生)이다. 그러나 ‘질문을 던지는 목적’은 달성했지만, 직업 수련 인턴제와 구직을 통한 청년의 자립 지원은 여전히 나아갈 방향을 잃고 부유한다. ‘씩씩이’가 사회적 기업 역시 일반 기업과 같이 이윤 추구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자백하는 순간, 말하는 이나 지켜보는 이나 괴롭긴 마찬가지다. 이제 가난의 징표는 누더기가 아니라 ‘직장으로 출퇴근하는 거리’라는 영화의 지적은 ‘뼈’를 때리고, 방황하는 청춘들이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해가고 있는 현실은 요지부동이다. 아무리 망가진 것이라도 시스템은 한순간에 무너지는 법이 없고 자본의 속성과 구조는 콘크리트 벽만큼 단단하다.

‘사람들을 죽여버리고 싶다’며 못 견디겠다던 ‘홍아’는 <소풍가는 고양이>의 유일한 생존자로 살아남았다. ‘원주’는 퇴사를 했다고 한다. 인턴십 첫날부터 지각했고, 근무하는 내내 반복적 지각과 업무 수행 능력의 비효율성을 지적받았던 원주의 지각 이유가 밝혀지는 후반부 출퇴근 장면을 지켜보는 일은 괴롭고 먹먹했다. 객석 여기저기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영화를 보며 가장 가슴 아팠던 순간이었다. 회사라기보다 동아리방 같았던 영화의 초반부 장면에 주로 쓰인 핸드헬드 촬영과 초점이 어긋난 쇼트들은, <소풍가는 고양이>가 매출 신기록을 달성하는 후반부로 갈수록 카메라를 삼각대 위에 고정해놓고 찍은 안정적인 쇼트들로 대체됐다. 화면이 안정감을 찾을수록 인물들의 정서적 현실은 팍팍해지고, 초반부 회사의 공기를 채우던 빈틈들이 사라지면서 정돈된 화면 속 현실은 더 비정해 보였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소풍 가듯 보기 시작했지만, 영화 막바지에는 납덩이를 달고 방독면을 쓴 채 턱밑까지 숨이 차오른 상태로 사막을 걷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막다른 골목 앞에서 갈 곳을 잃은 인물들의 막막함이 짙게 깔리고 관객들의 머릿속은 답을 찾는 질문으로 들끓는다. ‘우리는 멈출 수 있을까?’ 그리고 ‘사회적 기업은 지속 가능할까?’ 그런데 그 꽉 막힌 것 같은 답답함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대안이 있든 없든, 오늘도 누군가 그 고민을 물고 놓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포기하지 않고 질문을 하는 사람들과 그 질문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제 몫을 다했다. 사회적 기업이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이거나 ‘강남 좌파’ 같은 형용모순이라 할지라도, ‘질문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있다면 어떤 것일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길모퉁이가게> 같은 영화를 만들고 보여주려는 사람들의 욕망과 그 욕망을 보면서 질문에 동참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망이 만나는 지점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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