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른다, 아무것도 쥘 베른 <15소년 표류기>

어서 오세요! 동화의 숲
글 변왕중
그림 변다인

모른다, 아무것도
쥘 베른 <15소년 표류기>

국민학교 4학년 무렵, 어머니는 외동아들을 남 못지않게 키워보려는 야망이 있으셨던 모양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와중에 ‘계몽사 소년소녀 문학전집’을 구매하는 담력을 보이신 것이다. 도시락을 들려 아버지를 출근시키고 자신은 점심을 굶던 어머니가 돈이 있을 리는 만무하고, 할부로 구매하거나 친척에게 돈을 꿨을 것이다. 여하튼 11살의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나는 집중적으로 계몽사 소년소녀 문학전집을 읽었다. 여름에는 셋방 앞 툇마루의 빗소리와 매미소리에 들어앉아서, 눈 내리는 겨울에는 짐승 새끼처럼 아랫목으로 기어들어가 어린이 책을 읽었다. <이솝 우화> 속의 여우가 되고, 우유 수레를 끄는 개의 주인이 되었다가, 마법 양탄자를 타고 허공을 날아다녔다. 연탄재가 쌓인 골목은 신비로운 숲의 오솔길로, 낡은 지붕이 이어지던 마을은 검푸른 망망대해로, 순덕이 엄마와 길자 아버지와 해병대 삼촌은 요정과 마법사와 공주로 변했다. 그때의 나처럼 세상의 아이들은 이 세계를 새로운 공간으로 뒤바꾼다. 왜 그럴까? 모르기 때문이다. 눈앞의 확고한 의미나 질서에 대해 모른다고 말할 때, 이 세계는 유일한 진리가 아니라 수많은 갈림길 중 하나가 될 뿐이다. 다양한 길을 모색하게 된다. 모험과 탐험이다!

 

체어맨 기숙학교에 다니는 14명의 소년과 1명의 흑인 요리사 소년을 태운 슬라우기호는 20여 일의 표류 끝에 태풍을 만나 무인도에 도착한다. 소년들은 섬을 탐험해 지리를 파악하고, 살아갈 방법을 모색한다. 죽은 프랑스인의 동굴에서 지도를 발견한 소년들은 낯선 무인도에 이름을 붙인다. ‘뉴질랜드강’, ‘가족호’, ‘함정 숲’, ‘징검다리강’, ‘오클랜드 언덕’, ‘잉글랜드 곶’, ‘프랑스 곶’ 그리고 무인도는 학교 이름을 따서 ‘체어맨섬’으로 부른다. 체어맨섬이라는 낯선 세계에서 15소년은 나름의 질서를 만들어 살아간다. 모험심이 강하고 영리한 브리앙과 똑똑하지만 잘난 체하는 드니팬의 갈등이 있고, 성실하고 믿음직해 모두에게 존경받는 고든이 있으며, 부지런하고 손재주가 뛰어난 백스터, 아코디언 연주를 좋아하는 가네트와 모험 소설에 흠뻑 빠진 서비스, 난파의 원인을 제공한 자크, 가장 많은 몫을 해내지만 차별받는 흑인 모코도 있다. 즐거움이 있고, 어려움이 있고, 웃음과 슬픔이 있다.

 

15소년이 2년 동안 체어맨섬에 살면서 서로 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협력을 통해 위기를 넘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지금 보면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는 어린이 모험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근본적인 가치를 일깨우기 때문이다. 인간은 한 치 앞도 모르는 존재이고 그것으로부터 살아가는 힘을 얻는 존재라는 것이다.

무인도에 표류하기 전, 슬라우기호가 세찬 폭풍우와 비바람을 만났을 때, 걱정하는 한 소년에게 브리앙은 이렇게 말한다.

“함께 모여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눈을 꼭 감고 있어. 그리고 즐거운 상상을 해 봐.”

인생은 그것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난감한 현실 속에서 함께 모여앉아 즐거운 상상을 하는 것. 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 자신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우주를 알면 알수록 그 질서정연함에 놀라게 된다고 말했다. 우주가 카오스, 즉 혼돈이 아니라 코스모스, 즉 질서정연한 구조라는 것은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마치 안전하게 잘 구획된 우리들의 도시, 혹은 그 속에서 집을 짓고 직장을 다니고 사랑을 하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처럼. 그런데 상대성이론으로 해석되는 이 정확하고 합리적인 거대한 우주는 양자역학의 불안하고 불확정의 미시 세계를 기반으로 한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의 도시는, 그리고 나와 당신이라는 확고한 질서는 그 안의 수없이 미세하고 불안한 우연의 산물이라는 거다. 이 조화로운 앎의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둔 모름의 세계라는 것이다.

 

우리는 안다고 생각한다. 알면 알수록 행복에 가까워진다고 착각한다. 우리는 안다. 어느 동네 어느 음식점의 국수와 스파게티가 맛있는지, 최신 유행 패션과 메이크업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은 혜택을 받을 수 있고, 내가 가진 IT 기계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 똑같은 여행지라도 더 참신하고 더 감동적인 경험치를 획득하는 방법과, 타인을 다루고 심지어 지배하는 기술을, 애인이 왜 요즘 기분이 나쁜지, 친구의 삶이 어째서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지, 역사가 변하는 방향과 문명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내가 원하는 삶과 행복해지는 길을 ‘안다.’ ‘안다’에 집착하고, ‘안다’에 고정된다. 불안전한 ‘모른다’를 제거하면서 안심한다. 나에 대해 안심하고, 가족에 대해 안심하고, 사회에 대해 안심한다.

안다고 말하는 것은 ‘맞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는 순간 선택(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는 거짓이다. 그렇게 앎의 허상이 나와 당신을 지배한다. 현실에서 15소년들은 어른이 되었다. 이것저것 많이도 알고 있다. 바보들, 아무것도 모르면서, 미세먼지조차 제대로 해결 못 하면서, 당장 내게 필요한 게 뭔지도 모르면서.

 

어린이들은 모른다고 말하는 존재들이다. 모른다고 말하는 순간 확고한 현실은 무너진다. 나는 세상의 증언이 아니며, 세상은 나의 결과가 아니다. 모른다고 할 때 나를 둘러싼 도시가 과자처럼 바스러지고, 여름날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린다. 잔디 깔린 공원은 사막이 되고, 아파트 단지는 바다가 되고, 옆집 사람들은 외계인이 된다. 우리가 설정한 확고한 도시를 탐험하고 분해하여 새롭게 해석하고 딴 세상으로 만들어낸다. 희망이 있다면 역시 아이들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제시된 세계와 운명을 모른다고 말하는 존재들이다. 나의 앎, 그리고 나를 둘러싼 앎으로부터 멀어질 때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이해한다. 나로부터(나라고 믿는 것들로부터) 벗어나 진짜 나에게 한 발 다가간다. 삶은 더 즐거워진다. 어느 자리, 어느 순간이든 모험과 탐험이 시작된다. 표류하는 15소년이 된다.

내 고통은 정말 고통인가? 모른다.

이 쾌락은 진정한 기쁨인가? 모른다.

눈앞의 세상이 진실한가? 모른다.

당신은 당신의 중심으로부터 당신인가? 모른다.

동화를 읽는 궁극적인 이유는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아는 체하며 살지만, 모른다. 지난 금요일에 길 건너 벤치에 앉아 있던 햇살을 모르고, 내가 살아가는 진짜 이유를 모른다. 무신론자인 나는 언젠가 동화책으로부터 깨달음을 얻을지도 모르겠다.

 

알 수 없다.

아무것도.

그러니 이 세계는 유일하지 않다.

모른다.

어디까지? 나까지.

그러니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이것이 동화의 세계다.

당신이 ‘모른다’고 할 때, 오늘 저물녘 보았던 구름이 꿈속을 지나 내일 아침에 도착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른다. 그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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