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항쟁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

한 장의 사진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글 표학렬
사진 제공 인문서원

4․3 항쟁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

분단을 반대했던 제주도민의 4․3 항쟁은 ‘초기 봉기를 남로당이 주도하고 지도부 일부에 남로당원이 있었다’는 이유로 좌익 폭동으로 매도당했다. 그리고 수많은 도민이 학살당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도 일부에서 제주 4․3 항쟁을 폄하하고 매도하는 주장들을 하고 있다. 우리에게 4․3 항쟁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 것일까?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하는 무장대 200여 명이 봉기를 일으켜 관공서를 습격하고 경찰 등을 살상했다. 중앙당의 지시 없이 제주도당이 독자적으로 일으킨 무장봉기는 정치적으로 단독 선거 반대였지만, 실제로는 지난 1년 동안 경찰과 우익 단체가 저지른 무차별 테러 때문이었다. 1947년 3․1절 기념 시위에 경찰이 발포해 사상자가 난 후 제주도는 무차별 연행, 고문 살상, 도민 저항의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특히 우익 단체의 백색 테러가 사태를 악화시켰다. 제주도당은 도민들의 불만을 무장봉기에 적합한 정세로 인식하고 무장봉기를 일으켰던 것이다.

제주 주둔 9연대는 4․3 항쟁을 도민과 경찰 및 우익 단체의 대결로 인식했다. 9연대장 김익렬 대령은 일본 육군 소위 출신 친일 경력자로 좌익에 치우칠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4월 28일 무장대 총책 김달삼과 담판을 벌여 3개 항에 합의하고 무장봉기를 중지시켰지만 5월 1일, ‘오라리에서 무장대가 방화하고 경찰과 가족 등을 죽였다’는 보고가 올라오면서 협상이 깨졌다. 훗날 오라리 방화사건은 경찰의 자작극으로 밝혀졌다. 당시 오라리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경찰과 청년단원들이 무장대 관련자로 지목된 인물을 죽이고 집에 불을 지른 것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제주 4․3 항쟁은 대학살극으로 발전했다.

이승만 정권의 5․10 총선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한반도에서 철수하려던 미 군정은 김익렬을 경질하고 새로 박진경 중령을 9연대장에 임명했다. 그는 일본 육군 소위 출신으로 “제주도민 30만 명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어도 폭도를 소탕하겠다”고 선언했다. 그가 무차별 진압 작전을 전개하자 부하 일부가 반발해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 등이 그를 살해했다. 그러자 일본군 준위 출신 송요찬 등이 새로 연대장에 임명돼 폭도 진압에 나섰다. 이후 미군 작전명 ‘레드 헌트’, 말 그대로 사람 사냥이 시작됐다. 민간인 학살의 실태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 몇 가지만 들어보자.

 

마을의 노인 한 명을 엎드리게 한 뒤 젊은 여자 한 사람을 나오게 해 등에 태웠다. 토벌대는 이게 바로 빨갱이들이 하는 짓이다라고 소리친 후 2명 모두 사살했다.

민간인 학살을 피해 산으로 이형욱 씨가 들어가자 토벌대는 그의 아내를 대신 죽였다. 이를 대살(代殺)이라 한다.

동광리 마을 사람들이 민간인 학살을 피해 동굴로 피신하자 토벌대가 괜찮다며 나오라고 했다. 나간 사람들은 모두 학살당했다.

토벌 사실을 보도한 경향신문 제주 지사장 현인하, 서울 신문 제주 지사장 이상희, 제주신보 편집국장 모두 처형당했다.

– 2연대는 의귀리에서 무장대를 공격, 96명을 사살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현지 주민들은 무장대원 16명이 죽었으며, 나머지 80명은 토벌대가 초등학교에 수용돼 있던 피난민 80명을 즉결처형한 것을 전과에 포함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초토화 작전은 참혹했다. 160여 개 마을 중 130여 개 마을에서 학살이 일어났고, 당시 제주도민의 10%인 3만여 명이 학살당했다. 희생자 중 1만 3천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해본 결과 여성이 21%, 10세 이하 어린이가 5.6%, 61세 이상 노인이 6.2%나 됐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희생자 3만여 명에 대입하면 6천여 명의 여성, 1,500명 이상의 아이, 2,000명 가까운 노인이 학살당하였다. 왜 이런 무차별 학살이 이루어진 것일까?

학살이 어린이와 노인, 여자를 겨냥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4․3 항쟁의 진실이 좌익 폭동과 그 진압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노인 등 위에 여자를 태우고 기어가게 하며 “빨갱이들은 이렇게 한다”고 말하고는 총으로 쏴서 죽였다는 증언에서 빨갱이의 이미지가 계급투쟁이 아니라 ‘패륜’임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빨갱이에 대한 증오와 패륜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일제강점기 시절은 남존여비, 장유유서, 주종관계 같은 봉건적 상하관계가 일제 지배를 위해 강하게 유지됐다. 그런데 사회주의는 성별, 나이, 신분의 평등을 주장했다. 따라서 연장자 남성 지주들은 사회주의자의 일차 공격 대상이었고, 이들 역시 사회주의에 적대적이었다. 남성 지주들에게 평등은 기존의 질서를 뒤엎는 패륜이었으며 사회주의와 동의어였다.

문제는 남녀차별이나 주종관계는 사회주의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서도 청산돼야 할 봉건 폐습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봉건적 질서를 지키려는 자들의 노력은 자본주의, 민주주의의 일반적 가치까지도 사회주의로 간주하면서 소탕해야 할 적으로 간주, 빨갱이의 범위도 넓히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학살이 광범위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

4․3 항쟁으로 대표되는 극단적 빨갱이관(觀)은 자본주의의 자유와 민주적 가치마저 부정함으로써 한국에 파시즘이 정착하는 토양을 마련했다. 그래서 항상 정의의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4.19, 반(反)유신, 5.18, 최근의 광화문 촛불까지) 항상 반대편에서는 빨갱이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빨갱이는 사회주의자라는 의미에서 기성질서에 저항하는 개혁, 심지어 자유와 평등의 주장까지 광범위하게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의 도도한 흐름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박근혜 정부도 비록 대통령이 추념식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2014년 4월 3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함으로써 4․3 항쟁 자체를 부정하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했다. 우리가 자유와 민주를 헌법의 기본으로 삼는 한 4․3 항쟁을 폄하하려는 어떠한 시도, 자유와 평등을 빨갱이로 몰려는 어떠한 시도도 성공할 수 없다.

 

* 표학렬의 4.3 항쟁 관련 내용은 인문서원에서 출간한 <한 컷 한국 현대사>에 좀 더 자세히 수록되어 있습니다.

필자소개 표학렬
역사를 전공하고 고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입시 과목 역사와 재밌는 역사 사이에 끼어 교사 생활을 하다 중년의 나이에 늦바람이 불어 재밌지만 감동적인 역사책을 쓰려 노력하고 있다. 안빈낙도를 강조하지만 정작 자신은 고3 담임으로서 항상 전쟁터에서 살고 있다. 에피소드 역사 시리즈를 7권째 냈고, <한 컷 한국 현대사>,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등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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