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일상이 반짝이던 마데이라의 오후

살아 있는 부엌
글과 사진 류지현

꿈과 일상이 반짝이던 마데이라의 오후

“짝짝짝, 올레!”

탑승객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비행기가 안착했다. 마데이라(Madeira) 공항은 활주로의 한쪽은 높은 산이고 다른 쪽은 바다로 떨어지는 절벽이기 때문에 이착륙이 어려운 공항으로 손꼽힌다. 베테랑 파일럿만 배정된다는 여객기를 타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곳을 방문하는 한 해 여행객은 300만 명이 넘는다. 대서양의 작은 섬 마데이라는 연중 평균 온도가 섭씨 13도에서 26도로, 1년 내내 쾌적한 온도가 유지되는, 유럽인들의 인기 휴양지다.

아프리카 북서쪽 바다에 위치한 마데이라는 모로코에 더 가까운 화산섬이지만 포르투갈의 자치지구다. 조금 더 북쪽에 위치한 섬 포르투 산투(Porto Santo)와 함께 마데이라 제도를 이루며 크기는 제주도 절반 정도다. 바닷가를 벗어나면 바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섬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산인 마데이라에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오르막길을 오르락내리락했는지 셀 수가 없을 정도다. 마데이라 출신의 유명 축구 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아마도 이 가파른 오르막길에서 공을 열심히 차고 뛰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듯싶다.

오늘의 주인공 니꼴린을 만나러 마데이라의 중심 도시 푼샬(Funchal)의 시청 광장으로 나왔다. 니꼴린의 얼굴이 아침 햇빛에 부드럽게 반짝인다. 니꼴린은 2년 전 푼샬에서 차로 1시간 반쯤 거리에 사시는 부모님을 떠나 푼샬 대학으로 공부하러 왔다. 니꼴린도 우리 덕에 수개월 간 찾아뵙지 않은 부모님을 만나러 간단다. 화산섬이라 꼬부랑 길을 한참이나 돌까 봐 처음부터 멀미 걱정이 컸지만 수도 없이 많은 반듯한 터널을 지나왔다. 유럽 연합의 지원금을 받아 섬사람들과 물자의 이동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터널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800㎢ 크기의 섬에 100개가 넘는 터널이 있다니 가히 터널섬이라 불러도 될 듯싶다.

   

터널과 꼬부랑 길을 한참 지나 긴 오르막길을 오르는가 싶었는데 그 꼭대기에 오르는 순간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처럼 우아한 황금빛의 밀밭이라니! 예상치 못한 순간에 만나는 절경들은 그 아름다움이 배가 된다. 오르는 길에 가려 보이지 않는 그 너머의 선물을 이번 여행길에서도 이렇게 다시 한 번 만난다.

스무 살, 배낭 하나 덜렁 메고 남도 여행을 떠났을 때도 그랬다. 당시 단청 채색이 되지 않았던 나무 빛의 정갈한 무위사에 반해 걸어 나오다 왼쪽으로 나 있는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갔다. 번듯한 포장도로였기에 어딘가로 안내를 해주지 않을까 싶어 무심히 무위사를 다시 곱씹으며 걸어 올라갔다. 아, 오르막길이 끝나자 나는 끝없이 펼쳐진 녹차밭 앞에 서 있었다. 내 생애 첫 녹차밭, 내 생애 첫 오르막길의 선물은 그곳이었다.

“아직 물 흐르는 시간이 아니거든요.” 니꼴린이 대문 앞에 바로 나 있는 물길을 가리킨다. 동네 냇물길을 시멘트로 정리해놓은 것이라고 지레짐작을 하고 있었는데 실은 섬 전체에 설치된 레바다스(Levadas)라는 수로란다. 평소에는 물이 졸졸 흐르는데 정해진 시간이 되면 물이 콸콸 쏟아져 내린다. 시골에 사는 부모님 댁이 별로 그립지 않았다면서도 어린 시절 대문 앞 레바다스에 발을 담그고 놀았던 이야기를 풀어놓는 니꼴린은 잔뜩 신이 났다.

레바다스는 섬의 북서쪽은 습한 데 비해 남동쪽은 건조해서 섬 전체적으로 물을 이용하기 위해 설치된 전통적인 수로라고 한다. 지금은 용수 공급의 용도뿐만 아니라 수력 발전에도 쓰인다고 한다. 섬 전체가 끝없는 오르막길인 이곳에서 이 물길을 손수 만들었을 옛사람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해본다.

녹색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포도나무가 채양처럼 드리워져 있고 그 아래 그늘에서 고양이들이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다. 니꼴린의 부모님이 출출한 배를 달래라며 우리에게 간식을 내주신다. 유리그릇에 삶은 감자와 옥수수, 유카(Yuca, 고지대에서 재배되며 감자와 비슷한 작물)와 간단한 샐러드뿐인 단출한 식탁이지만 식탁에 둘러앉아 감자를 까먹으며 옛날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소풍이라도 온 기분이다.

집 구경을 시켜준다며 나선 니꼴린의 엄마가 마당 한쪽에 나 있는 오래된 나무문을 열고 들어간다. 어두운 창고 한쪽에는 와인이, 다른 한쪽에는 성글게 만든 나무 테이블이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감자가 잔뜩이다. 그 위아래로는 나뭇잎들이 감자와 함께 뒤엉켜 있다. 테이블 위에 천을 깔고 채소를 놓는 것처럼 나뭇잎을 대신 쓰시나 했더니 사실 이 나뭇잎이 감자 보관의 핵심이라고 한다. 유칼립투스 나뭇잎과 함께 감자를 보관하면 감자에 벌레가 꼬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번에는 그녀가 반대편 문으로 들어가더니 토마토 병조림을 몇 개 들고 나왔다. 이렇게 쉬운 게 없다며 그녀는 요리법을 풀어놓는다. 소독한 유리병에 토마토와 마늘, 딜(Dill, 허브의 일종으로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는 음식에 딜을 사용한다) 등을 넣고 끓인 단촛물을 부으면 그만이다. 뚜껑을 잘 닫고 담요나 남는 천 등으로 감싸 식을 때까지 놔둔다. 다 식은 토마토 병조림을 창고에 보관하면 몇 개월이고 거뜬히 문제없이 보관할 수 있다. 토마토를 살짝 데쳐서 단촛물 대신 올리브유를 부어놓으면 토마토 올리브유 절임이 된다고 한다. 토마토를 끓여 소스를 만들 때는 올리브유를 병 위쪽에 듬뿍 담으면 더 오래 보관할 수 있고 올리브유의 향이 듬뿍 배어 나와 풍미가 좋다.

   

“생리통이 있으면 엄마가 이걸로 차를 끓여줬어요. 우리 엄마는 이런 걸 다 알아요. 신기하죠.” 마당에 피어 있는 카모밀라 꽃을 보여주는 니꼴린의 눈이 반짝인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니꼴린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난 이 섬을 떠나고 싶어요. 리스본, 리스본에 가면 더 근사한 삶이 있지 않을까요?” 이제 그녀는 섬을 떠난 먼 곳에서의 삶을 꿈꾼다. 섬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부모님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고 한다. 타지의 사람들이 꿈꾸는 고요한 이 섬에서 그녀는 바깥세상을 꿈꾼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좋을 것만 같다.

오래전 몽골을 처음 갔을 때의 일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초록 들판 위를 영화처럼 말을 타고 달려오던 소년을 만났다. 그렇게 멋지게 말을 타는 모습을 실제로 본 건 처음이라 정신이 빠질 만큼 반해 있었는데 소년이 내게 물었다. “네 운동화는 나이키야?” 순간 나는 무척 당황했다. 내 운동화가 나이키가 아니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멋지게 말을 탈 줄 아는 사람이 기껏 나이키를 부러워하나 싶었다. 내가 꿈꾸는 그것은 그에게는 그저 일상일 뿐이었고 그가 꿈꾸는 그것은 나에게는 그저 운동화일 따름이었다. 니꼴린의 꿈꾸는 눈 속에서 몽골 소년의 작고 까만 눈이 겹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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