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영원한 숙제

전영석의 부엉이 극장
글 전영석

가족, 영원한 숙제
영화 <어느 가족>

프랑스 감독 ‘자비에 돌란’의 자전적 영화 <단지 세상의 끝>의 주인공은 ‘가족’이라는 이름의 ‘지옥’이다. 누구에게나 자기 삶에서 가족과 함께 ‘세상의 끝’에 가본 경험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가족은 하나의 이름으로 뭉쳐지지만 때론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다. 관계의 접점은 영원하지 않고 경계의 안과 밖을 넘나든다. 영원한 화해나 결속은 불가능하고 짧은 공명(共鳴)과 연대 후에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난다. 그러다 가족이라는 허울만 남기도 한다. 어쨌건 가족이라는 ‘관계의 생물’을 쉽게 정의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혹은 그곳)이 ‘세상의 끝이자 시작’이기 때문이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가족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존재들이고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관계들이다. 풀기 힘든 영원한 숙제, 질기다 못해 징글징글한 관계. 가족은 불가항력이다.

가족에 대한 내 첫 기억은 본동 서민아파트 단칸방에서 시작된다. 다섯 살 아이에게 부모는 거대한 우주였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이사 간 사당동 집에서 처음으로 내 방이 생겼다. 그러나 부엌 옆에 딸린 내 방 미닫이문에는 잠금장치가 없었다. 머리가 조금 굵어지자 엄마가 시도 때도 없이 방문을 열고 내 공간에 들어오는 것이 죽을 만큼 싫었다. 14인치 흑백 TV로 방영되는 외화를 보며 ‘여기가 아니라 미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주문을 기도문처럼 되뇌었다. 그때부터 독립해서 혼자 사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지만, 부모가 내 삶의 영역을 마음대로 침범하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을 견디기 힘들었다. 가족은 내게 애증의 대상이었다. 살면서 가장 끔찍했던 순간은 내 속에서 어린 시절, 그토록 싫어했던 부모의 모습이 튀어나올 때였다. 그럴 때마다 ‘나’를 지워버리고 싶었다. 무엇보다 ‘내가 가족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괴로웠다.

아버지가 되고 싶은 남자가 있다. 엄마가 되고 싶었던 여자도 있다. 남편과 자식에게 버림받고 혼자 사는 할머니의 연금이나 노리며 그 집에 빌붙어 사는 기생충 같은 인생들이다. 도둑질을 일삼는 것도 모자라 어린아이들에게 도둑질을 가르친다. 진심으로 ‘아빠’가 되고 싶었지만, ‘그것 말고는 가르칠 게 없었습니다’라는 가짜 아빠의 고백은 안쓰럽고 처절하다. 영화 <어느 가족>은 친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주워 키우는 어른들이 각자의 사연을 숨긴 채 서로를 ‘선택’해 이상한 가족을 이뤄 살아가는 이야기다. 사회의 통념으로 보면 그들은 가족인 척하는 ‘가짜 가족’이지만, 버림받은 가짜들끼리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진짜(혈연관계)보다 더 진짜 같은 가족이 돼간다. <어느 가족>은 ‘가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답안지다. 아니, 그것은 차라리 리트머스 시험지에 가깝다. 한 번이라도 이 문제를 풀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정답은 없다. 고레에다 감독은 ‘불가항력’과 ‘선택’의 문제를 파고들며 가족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는 ‘가족은 이래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에 반문함으로써 가족이라는 경계의 끝에 서서 그 경계를 넓히고 재정의하려고 시도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바다의 파도 끝에 물이 잠깐 멈추는 순간이 우리의 인생이다’라는 C.S. 루이스의 말처럼, <어느 가족>은 찰나 같으면서도 영원 같고, 하나 같으면서도 여러 갈래인 가족의 정의와 삶을 이야기한다.

가족은 ‘나’와 ‘세계’가 처음 만나는 접점이다. 어린 ‘린’은 친부모의 폭력에 상처받고 버림받았지만 뒤틀어지지 않고 오히려 뒤틀어진 어른들의 상처를 사랑으로 보듬으려 한다. 파친코 주차장에 버려진 ‘쇼타’는 자기를 구해서 키워준 가짜 아빠/엄마의 세계가 아빠의 조잡한 마술처럼 시시하고 별것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몹시 혼란스러워한다. ‘아빠’라고 불러주길 열망하던 가짜 아빠 ‘에노키’가 자신의 역부족을 인정하고 ‘아빠는 이제 아저씨로 돌아갈게’라고 고백하는 순간, 쇼타는 마음을 다해 입속말로 ‘아빠’라는 단어를 벙긋거린다. 그 벙긋거림은 모두가 행복했던 바닷가 물놀이 장면에서 시바타 할머니가 벙긋거린 ‘다들… 고마웠어’라는 입속말과 함께 세상에 발화되지 못한다. 그러나 소리가 되지 못한 그 울림은 가짜가 아니었다. “(불꽃놀이가) 안 보이지만 소리를 보라”던 ‘에노키’의 대사처럼, 보이거나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발화된 말보다 더 깊고 큰 그 속삭임은 ‘가족은 핏줄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어진 관계’라는 진실을 불러낸다.

<어느 가족>을 네 번 봤다. 40여 년을 누군가의 아들로 살았고, 다시 8년을 누군가의 남편으로 살고 있지만, 그래도 가족이 뭔지 여전히 모르겠다. 아마도 죽는 순간까지 이 숙제를 다 풀지 못할 것 같다는 슬픈 예감이 든다. 그래도 얻은 것은 있다. 고레에다 감독의 질문은 날카로운 칼끝이 돼 우리 마음을 서늘하게 후벼 팠지만, 봄날 햇살 같은 장면 몇 개의 잔상이 그 상처를 따뜻하게 어루만져줬다. 오랜 시간 쇼타의 도둑질을 알고도 눈감아준 야마토야 문방구 아저씨의 관용과 이해, 마음을 다해 ‘쇼타’의 아버지가 되고 싶었지만 그 방법을 몰랐던 ‘에노키’의 비애, ‘진정한 사랑은 놓아주는 것’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이루기 힘든 명제를 실천함으로써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노부요’의 헌신…. 그녀는 비록 아이를 낳지 못하지만 자기희생을 통해 ‘쇼타’와 ‘린’의 진짜 엄마가 된다.

그들의 이상한 가족 실험은 실패했다. 그럼에도 ‘핏줄’이 아니라 ‘선택’과 ‘사랑’으로 이어진 가족 관계의 가능성은 여전히 우리 앞에 열려 있다. 가족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지는 우리 손에 달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가족의 사랑과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가족이란 이름의 ‘밝은 어둠’을 끈질기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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