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피스, 있는 그대로의 나와 당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화국

김남희의 여행의 일상
글과 사진 김남희

우주피스,
있는 그대로의 나와 당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화국

젊은 날에는 나도 꿈을 꾸었다. 어떤 이념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고 싶다는, 마지막 순간까지 순진무구한 이상주의자로 살고 싶다는 꿈을. 하지만 치맛자락이 닳도록 돌아다녀도 지상에 유토피아는 없더라. 그 사이 세파에 찌들어 인간은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없다고 믿기 시작하면서 내 청춘은 지나갔다. 애꿎은 원망은 존 레넌에게 향한다. 어쩌자고 <이매진(Imagine)> 같은 명곡을 써서 들을 때마다 울컥하게 만드는 거냐고. 이 노래를 들을 때만큼은 나의 탁해진 영혼을 초강력 세정제로 닦아내고 싶어진다. 국가도, 종교도, 전쟁도 없이 살아가는 땅을 여전히 찾아 헤매지 않느냐고, 탐욕과 굶주림도 없고 오직 인류애만으로 모든 것을 공유하는 곳을 아직도 그리지 않느냐고 묻게 된다.

유토피아 정도는 아니어도 재미있는 상상력이 발현된 곳은 만난 적이 있다. 발트 3국의 하나인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 그곳에는 초소형 독립 공화국 우주피스(The Republic of Uzupis)가 있었다. ‘강 건너편’이라는 이름처럼 빌넬레강 너머에 자리한 예술인 공동체다. 1997년 4월 1일에 만우절 농담처럼 독립을 선포했다. 우주피스는 계절마다 색이 바뀌는 네 개의 국기와 국가, 내각과 대통령, 고유의 헌법과 화폐를 지녔다. 군대도 있는데 12명의 군인은 어린이와 청소년이다. 600명이나 되는 대사(Ambassador)도 활약 중인데 대표하는 분야가 좀 이상하다. 고양이 대사, 개 대사, 바람 대사 등이다. 현재 공화국의 대통령은 로마스 릴레이키스(Romas Lileikis)로 시인이자 음악가, 영화감독이다. 대통령의 스펙이 이 정도라면 ‘사기캐’다.

오랫동안 유대인들이 모여 살았던 이곳은 대부분의 유대인이 나치에게 학살당한 후 버려졌다. 폐허가 된 이 동네를 찾아온 이들은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이들이었다. 몸을 파는 여자들과 집 없는 남자들과 약에 중독된 청춘들이 수도와 전기가 끊긴 집들을 차지했다. 리투아니아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1991년 무렵, 이곳은 빌뉴스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에 이름을 올렸다. 평범한 이들이 발길을 끊은 곳에 패기 넘치는 이들이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잃을 것이 없어 두려울 것도 없는 가난한 예술가들이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을 중심으로 우주피스 공화국을 선포하고 20년이 지난 지금, 우주피스는 리투아니아의 청년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지역이 됐다. 예술가와 보헤미안의 아지트가 돼 정기적인 패션축제, 시의 밤, 음악 콘서트와 전시회가 1년 내내 열리는 ‘핫 스팟’이 됐다. 극적인 변화다.

6월 중순의 우주피스는 완벽한 날씨였다. 녹음 사이로 부드러운 햇살이 쏟아지고 공기는 가볍게 포슬거렸다. 우주피스로 들어가는 관문인 다리 밑에는 명물이 된 그네가 걸려 있었다. 교각에 매달린 그네에는 젊은 연인이 온갖 각도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의 여행은 오직 사진이 증명해줄 뿐이라는 듯 성실히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 우주피스로 들어섰다. 담벼락에 걸린 그림들, 길모퉁이에 아무렇지 않게 놓인 조각들이 이곳이 예술가들의 해방구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곳에 거주하는 7,000명 남짓한 주민 중 1,000명이 자신의 직업을 예술가라고 밝힌다. 그들이 만든 수공예품이나 그림을 파는 작은 가게들, 널찍한 테이블이 놓인 노천카페가 골목마다 이어졌다. 관광객과 주민이 뒤섞여 있었고, 어디나 살짝 들뜬 분위기가 엿보였다. 평화롭고 나른했지만 지루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우주피스의 유일한 규칙은 미소’라고 했다. 어떤 경우에도 웃을 것. 이곳에 들어오면 마음을 열고 창조적으로 될 것. 고정적인 사고로부터 자유로운 보헤미안들이 사는 곳이니까. 우주피스 공동체의 일원이 되려면 무언가를 대표하는 대사를 자처하고, 공동체의 모임에 얼굴을 내밀면 된다. 나는 무슨 대사를 자임할까. 남편도, 아이도, 집도 없이 사는 삶이니 ‘마이너스의 삶’ 대사? 아니, 나는 늘 시간 부자로 살고 있으니 ‘시간 대사’를 해야겠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그 유명한 헌법과 마주쳤다. 우주피스의 중심가에 23개 언어로 걸려 있는 헌법이다. 41개 조항으로 이뤄진 이 헌법이야말로 우주피스의 고갱이다. 1998년의 어느 여름밤, 개를 사랑하는 시민(현 우주피스 대통령)과 고양이를 사랑하는 시민(현 외무장관)이 함께 만들었다. 내가 이 공화국의 시민 자격이 되는지 매의 눈으로 살폈다.

제1조. 모든 국민은 빌넬레 강변에 살 권리가 있고, 빌넬레강은 국민 곁을 흐를 권리가 있다.
제5조. 누구나 개성적일 권리가 있다.
제8조. 누구나 익명의 보통의 존재가 될 권리가 있다.
제10조. 모든 국민은 고양이를 사랑하고 돌볼 권리가 있다.
제11조. 모든 국민은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개를 돌볼 권리가 있다.
제13조. 고양이는 집사를 사랑할 의무는 없으나 필요한 경우 집사에게 협조해야 한다.
제20조. 누구도 폭력을 사용할 권리가 없다 .
제28조. 누구도 불멸을 기획할 권리가 없다.
제32조. 모든 국민은 그들의 자유에 대한 책임이 있다.

조항 하나하나가 다 끝내준다. 당장 공화국의 시민이 되고 싶었다. 이곳에 거주하는 이들은 ‘행복할 권리’ 못지않게 ‘행복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사랑할 권리’와 더불어 ‘사랑받지 않을 권리’도 주어진다. ‘침묵할 권리’가 인정되고, ‘울 수 있는 권리’와 ‘두려워하지 않을 권리’가 받아들여지지만 ‘권리를 거부할 권리’와 ‘가끔은 의무를 자각하지 않을 권리’ 또한 부여된다. 모든 것을 ‘의심할 권리’도 있으며 ‘실수할 권리’와 ‘게으를 권리’도 누릴 수 있다. 이 대목에서 내 가슴이 짜릿해졌다. 나야말로 이 공화국에 어울리는 시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 인생은 온갖 실수와 게으름의 환상적인 콜라보에 다름 아니니.

우주피스 공화국의 국가 이념은 헌법의 마지막 부분인 39조부터 41조에 명시돼 있다. ‘싸우지 않고, 이기지 않고, 항복하지 않는다.’ 이게 말이야 소야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은 공화국 시민의 자격이 없다. 우주피스가 나를 흔든 건 바로 이 헌법의 조항 속에 깃든 ‘있는 그대로의 나와 당신’을 인정하는 태도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이매진’의 유토피아는 만우절 헛소리에 불과할 테니. 이곳에 있는 한 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으로만 끝까지 남을 수 있을 것 같아 가슴이 뛰었다.

   

언젠가 다시 우주피스에 오게 된다면 꼭 만우절에 오고 싶다. 공화국 선포일인 4월 1일 하루 동안 우주피스의 관문인 다리에는 출입국 관리 사무소가 설치된다. 이민국의 직원이 엄숙하게 묻는다. 공화국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웃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동의한다면 여권에 입국 비자가 찍히고, 공화국에 입국할 수 있다. 이 공화국이 법률적 효력을 갖고 실재하는 공화국인지 심각하게 따지지 말자. 예능에 다큐로 반응하는 건 촌스러울 뿐이니. 우주피스 공화국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즐기는 자세면 충분하다. 지도에도 없는 초미니 공화국.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괜찮은 곳이 있다는 것. 우주피스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조금 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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