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을 깨워준 곰과의 조우

어느 봄날의 캐나다 야생 여행기
글과 사진 긴수염

야성을 깨워준 곰과의 조우

캐나다는 1년의 절반이 겨울이라는 농 섞인 말처럼 길고 길었던 겨울이 끝났다. 드디어 로키산맥의 깊은 곳으로 가는 길들이 열렸다. 겨우내 야생동물의 천국이었을 공간이 인간에게도 허락된 것이다. 모든 생명이 기지개를 켜는 봄의 로키는 어떨지 궁금해서 차를 빌려 일행과 북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잿빛 산맥에 켜켜이 쌓였던 하얀 눈이 따스한 햇살에 녹아내리고 있다. 마치 아이스크림처럼. 로키에 올 때마다 <그림을 그립시다>의 밥 로스가 하던 경쾌한 붓 터치와 습관처럼 하던 말이 떠올라 웃음이 나온다. ‘참 쉽죠?’ 침엽수림에 듬성듬성 올라오는 연둣빛이 참 싱그럽다. 그가 방금 붓 터치를 한 것만 같다.

새싹이 돋아나오는 모습은 내 몸의 어딘가를 간지럽힌다. 마치 ‘수염’이 불쑥 자라날 때의 그 느낌이다. 생명이 움트는 순간은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강하게 발산해 내 안에 죽은 듯이 자고 있던 무언가를 깨운다. 우울이라는 검은 흙 속에 깊이 묻혀 있던 씨앗이 야생에 나오면 비로소 싹이 트는 느낌이다. 그 씨앗은 바로 현대문명에 길들여지지 않은 채 내 안에서 억제된 야성이었다. 본능이 억압되지 않고 제대로 발휘될 수 있는 곳에 닿으면 시너지 효과가 일어난다. 로키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문명의 흔적이 희미해질수록, 야성적 감각은 선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더 멀리 보이고, 더 잘 들리며, 호기심과 모험심이 왕성해진다.

캐나다 재스퍼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기로 하고, 승마부터 시작했다. 말 등에 앉으니 시야가 높아져 내가 거인이 된 것 같았다. ‘잘 부탁한다’고 말하자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안다는 듯이 봄 냄새 나는 자작나무숲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꿀렁거리는 말 등에서 무념무상이 되었고, 끝내주는 경치가 눈에 가득 들어왔다. 그런데 말이 오르막을 오를 때마다 기침을 해서 마음이 불편해졌다. 관광객을 계속 태우느라 힘든 모양이다. 차라리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즈음이었다. 맨 앞에 가고 있던 가이드의 말이 멈춰서 안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자 가이드가 말의 뺨을 주먹으로 세게 퍽퍽 때리는 게 아닌가! 너무나 놀라웠고, 폭력을 말리고 싶었지만, 그들이 먼 거리에 있어서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원점에 도착해 말에서 내리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른 직원에게 ‘가이드가 말을 심하게 때리는 걸 봤는데 다시는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고 넌지시 일러주었다.

캐나다는 동물복지가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별생각 없이 승마를 했다가 동물을 이용하는 관광 상품은 필연적으로 동물을 착취하고 학대를 동반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충격이 컸던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내게 캐나다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세상 그 어디도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인간이 동물을 이용하려고 하는 한, 동물착취와 학대로부터 자유로운 곳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포장은 번지르르하게 돼 있어도 동물을 길들이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전혀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관광수익을 위해 동물을 이용하는 것이 과연 괜찮은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됐다.

다음 날은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재스퍼 주변의 경치 좋은 곳을 달렸다. 살아 있는 생명체를 타지 않으니 일단 마음이 편했다. 부릉부릉, 로드킬을 주의하며 신나게 달리다 야생동물을 발견하면 길가에 멈춰서 그들을 관찰했다. 겨울잠을 마치고 먹이활동을 하는 곰들이 자주 보였다. 주로 채식하는 블랙 베어지만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니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특히 새끼와 함께 있는 곰은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새끼가 위협받는다고 느끼면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엘크와 사슴이 흔했지만 볼 때마다 반가웠다. 그들은 멀리 가지 않고 풀을 우적우적 씹으며 우리를 바라본다. 인간이 해로운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거리다. 이렇게 인간을 크게 피하지 않는 야생동물을 만날 때마다 기쁨이 샘솟는다. 하지만 야생동물이 너무 다가오면 관광객에게 길들여진 것 같아 착잡할 때도 있다. 인간과 야생동물이 적당한 거리를 지키는 것이 서로를 위하는 길이다.

내친김에 전문적으로 야생동물 투어를 하는 업체를 찾아가 밴을 타고 설명을 들으며 돌아다녔다. 내가 캐나다에 온 이유인 늑대를 보고 싶었지만 어렵다고 한다. 대신 털갈이를 하는 중인 엘크를 바로 옆에서 관찰하고, 저 멀리 산맥에 하얀 눈처럼 보이는 마운틴 고트(Mountain goat, 로키산맥에 사는 산양의 일종)와 빅혼 쉽(Bighorn sheep, 큰뿔야생양) 무리도 볼 수 있었다. 앨버타주와 브리티시컬럼비아주 경계까지 가서 강줄기에 비버가 만든 작은 댐도 구경하고, 호수 주위를 배회하는 그리즐리 베어도 볼 수 있었다. 육식을 하는 곰이라 긴장됐다. 그가 우리를 발견하고 슬금슬금 걷다가 빠르게 달려오기 시작한다. 우리는 안전을 위해 밴에 올라탔다. 곰이 거의 근처에 왔을 때쯤 가이드도 허둥지둥 올라탔다. 곰의 기세가 무시무시하다. 만약 호수를 걷다가 마주쳤으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뭔가를 타고 다니는 것에 질려서 걷기로 했다. 내 몸으로 나의 동력을 이용해서 돌아다니는 것이 마음도 편하고 더 많은 것을 느릿느릿 충분히 느낄 수 있어서 좋다. 봄의 기운이 만연한 자작나무숲, 푸른 하늘과 청량한 공기, 날씨까지 완벽하다. 일행과 캐나다에서 곰을 만나 다치거나 죽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걷고 있는데 전방에 야생동물의 기운이 느껴졌다. 잠시 후 오솔길 옆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본능적으로 ‘곰’이라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러자 앞뒤에 있던 일행이 둘 다 얼음이 돼버렸고, 나는 그 사이에 끼어서 엉거주춤. 서서히 일어선 갈색 곰은 우리보다 키가 컸다. 그 옆에 새끼 두 마리가 있었다. 큰일이다. 자칫 잘못하면 곰이 공격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 그는 우리를 내려다보며 킁킁거렸고, 일행이 나에게 어떻게 하냐고 물었다. 곰이 길을 막고 있는 게 아니라 옆에 있었기 때문에 걷던 방향으로 걸어가자고 했다. 곰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천천히 침착하게 걸어갔다. 뒤를 슬쩍 돌아보니 곰이 약간 쫓아와 우리가 가는지 확인하는 눈치였다. 이때의 경험은 야생에서 살아갈 나에게 생존과 관련해 무척 중요한 경험이 됐다. 나중에 일행은 ‘10년 감수했다’며 너무 무서웠다고 했다. 내 덕에 잘 빠져나온 것 같다고. 평소 혼자 다닐 때 들고 다니던 베어 스프레이와 나이프를 그날따라 안 들고 갔는데 운이 좋았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일행이 있었기에 곰도 섣불리 공격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만약 나 홀로 아무것도 없이 갔다가 곰을 만났으면 나는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오히려 일행에게 고마웠다.

   

   

재스퍼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앨버타주 남부에 있는 워터튼 국립공원으로 달렸다. 남쪽으로 달릴수록 봄기운이 짙어졌다. 너무 파래서 비현실적이었던 워터튼 호수에서 망중한을 보내고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 노란 꽃이 수놓인 초원에 드러누웠다. 꽃향기가 알싸하다. 곰을 만나 바짝 긴장했던 몸과 마음이 풀리는 기분. 알 수 없는 웃음이 나오고 웃는 나를 보고 일행도 따라 웃는다. 다 같이 들판에 뒹굴며 한참을 웃었다. 그런데 누군가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주위를 둘러보니 저 멀리 언덕에 까만 곰 세 마리가 있다. 곰과 자주 만나면서 곰 감지 능력이 향상이라도 된 것인가. 여행이 끝나갈 무렵 도시로 돌아가는 게 내키지 않았다. 걷다가 조우한 곰이 나에게 야성의 감각을 깨워준 게 확실하다. 야생동물한테 죽을지라도 이대로 야생을 누비며 자연에 묻혀 살고 싶다는 욕망이 점점 강해졌다. 야생에서는 매순간 살아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여행을 마치며 내가 원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고민이 다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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