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한순간

행복의 한순간

   

매일 매일 일상 행복

‘나이듦’은 젊은 시절의 오감을 더듬으며 흐릿해져가는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되새김질하는 시간이 아닐까?

돌아가신 시할머니는 아흔이 넘은 연세에도 쪽진머리를 하고 계셨다. 그 모습이 하도 곱고 단정하여 뵐 때마다 한줌도 안 되는 할머니의 쪽머리를 하염없이 바라봤었다. 할머니는 걸음을 떼실 수 없을 때까지 매주 예배당에 가셨고 몇 벌 되지 않는 옷가지를 항상 본인이 챙겨 개셨다. 바닥의 머리카락은 보일 때마다 손으로 주웠고 매일 성경을 필사하셨다. 단출하고 가난한 일상이었지만 남루하지 않은 생의 마디를 조용하고 깊고 오래 새기고 계셨던 할머니는 일상 속의 구도자셨다.

요즘은 매일의 성실함으로 하루하루를 채워가시던 할머니의 일상을 내 일상에 가만히 비추어본다. 매일은 아니어도 한겨울 새벽에 보리차 끓이는 냄새로 온 집안을 채운다. 두 아이들이 등교한 뒤에는 추워도 작은 보온병에 물 한 병 담아 한강변을 걸으러 나간다. 치장은 열외하고 청결함에 몰두하며 오래되고 낡은 옷을 손질할 때면 가난해도 남루하지 않은 할머니의 일상을 찰나와 같이 만나는 마음이 든다. 아이들이 하교하고 출출하다며 방금 전에 구워둔 고구마 앞에 앉는다. 종알종알 하루의 일과가 식탁 위에서 흐르고 매일 매일의 소소한 오감이 성실히 수집된다.

청빈한 나이듦이 만드는 곱고 단정한 일상, 그 속에서 찰나와 같은 행복을 느끼며….

글과 사진 강지인 / 주부

 

내 안의 시인과 만나다

나는 요즘 매일 퇴근길 전철에서 핸드폰에다 시를 쓸 때가 가장 행복하다. 액정에 금이 가고 케이스도 깨졌지만 손때 묻은 내 아이폰6로 블로그 일기장에 시를 쓰는 것은 꼭 빛바랜 연습장에 만년필로 선을 긋고 손 글씨를 끄적거리는 것만큼 어쩐지 감성적이기까지 하다. 퇴근길에 전철을 타고 가며 주위를 둘러보면 사람들은 핸드폰으로 드라마나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한다. 너도 나도 유튜브를 본다. 하지만 나는 이제 유튜브 추천 영상에서 보고 싶은 영상이 없을 만큼 유튜브 시청도 질렸다. 그래서 그냥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 상상해오던 시 쓰기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이런 결심을 한 데에는 얼마 전 이사를 하면서 책 한 권을 발견한 일이 용기가 됐다. 유종호의 <시란 무엇인가>(민음사, 1995)라는 책이었다. 표지는 예스럽고 안쪽의 종이는 누렇게 바랬다. 꽂혀 있던 책갈피는 그 시절 책을 사면 하나씩 꽂아주던 보잘 것 없는 저렴한 플라스틱 재질의 그것이었다. ‘내가 이런 책도 샀던가’ 하는 생각과 함께 시가 어렵게만 느껴졌던 어린 시절의 기억도 떠올랐다. 책을 몇 장 넘겨봤는데 의외로 그 내용이 재미있어 그 후로 2~3주 동안 매일 저녁 한 챕터씩 읽었다. 책을 모두 읽고 나니 이번에야말로 시를 쓸 수 있겠다 싶었다. 용기를 내보자! 그런데 어떻게 시작하지? 이런 생각들을 하던 중에 몇 개월 전 본 짐 자무시 감독의 <패터슨>이란 영화의 주인공이 떠올랐다. 그는 버스 기사인데 출근시간, 점심시간 사이에 남는 짧은 틈새시간에 작은 수첩을 펼쳐 자신만의 시를 썼다. 그렇게 해서 나도 패터슨의 방식으로 퇴근길 지하철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3개월이 흘렀다. 시의 소재는 퇴근길 지하철 밖의 풍경, 중학교 1학년생이 혼자 제주도 자전거 일주를 떠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떠오른 응원 문구, 데이트 신청을 했다가 차인 날의 감정, 회사에 신입 직원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느꼈던 행복감, 이미 회사를 떠나간 동료들에 대한 상실감, 점심시간에 혼자 앉아 있다가 문득 올려다본 애수 어린 파란 하늘 등이었다. 사소하지만 스쳐 지나는 순간들에 대한 내 솔직한 마음을 다듬이질하듯이 리듬감 있는 말로 비유를 하며 자판을 두들겨 속내를 풀어냈다.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단어와 말로 그렇게 내 마음을 다독이며 떠들고 나면 꽤 괜찮고 뿌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글과 사진 양승주 / 잡지 에디터

 

내 마음의 번역기

저는 일기장이 없습니다. 없고, 두서없이 글을 써 버릇해서 누구에게 보여줄 만한 변변한 글도 없습니다. 없는데, 저는 제 글들을 보고 있노라면 자꾸 행복해집니다. 그게 제가 남겨 놓은 그날의 유산과도 같은 거라서, 어찌 보면 사진보다 더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제게 있어 사진은 말을 하지 못하지만, 글은 말을 합니다. 그 말들이 가끔은 파도치고 출렁이며 멀미나게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건 분명 그날의 ‘나’라고요.

행복의 한순간에 관해 글을 쓰기 위해 ‘다분히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것들을 자물쇠로 걸어 잠근 뒤, 그 열쇠는 나만이 알 수 있는 곳에 감춘’ 제 글들을 꺼내 읽었습니다. 슬픔을 무덤덤하게 이야기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신념에 사로잡혀 떠들기도 합니다. 가끔은 메타포를 남발하여 저조차도 헷갈리지만, 기록하는 순간과 꺼내보는 순간의 저는, 온전히 ‘나’일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저 사진 속 메모는 새벽까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글들을 읽다가 쓴 글입니다. ‘우리’는 계속 여러 가지 형태로 시간을 맞이하겠지만, 저 글은 핏기 없이 박제된 채 제가 기억하는 대로 살아 있을 겁니다. 우리 마음의 번역기가 잔뜩 슬픔으로 얼룩져 있어도, 기쁨을 치장하고 있어도 부정하지 마세요. 온전히 ‘나’일 수 있는 순간, 행복은 거기에 있으니까요.

행복의 한순간 덕분에 그간의 글을 꺼내보며 행복했고, 이 글을 쓰며 또 행복합니다.

저는 제 모든 글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저한테는, 앞으로도 일기장은 없을 것입니다.

글과 사진 갈선호 | 기타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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