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철교 밑으로 시간은 흘러간다

어서 오세요! 동화의 숲
글 변왕중
그림 변다인

한강철교 밑으로 시간은 흘러간다

앨런 세이 <할아버지의 긴 여행>

내 책상 사진액자 속에는 십수 년 전의 어느 겨울밤이 있다. 조그마한 잡지사에 다니던 시절이다. 사장이 편집부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꽤 자유로운 회사였다. 직원들끼리 심심하면 스타크래프트를 했고, 매일 저녁 몰려다니며 술을 마셨다. 함박눈이 내린 그날도 술에 취해서 집에 들어갔더니 어린 딸이 중무장을 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두꺼운 파카와 장갑과 목도리를 한 아이의 표정 앞에서 술을 마셨고 피곤하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집 앞 공원에 가서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밤에 만든 눈사람은 아주 커서 역사 이래 대한민국 3인 가족이 만든 눈사람 중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힐 게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눈사람을 사이에 두고 빙긋 웃으며 사진을 박았다. 가끔 책상 위의 사진을 보면서 그때를 그리워한다. 기필코 아빠를 끌고 눈사람을 만들러 가겠다고 결심했던 어린 딸, 사진기를 매고 동물원을 다니던 와이프, 점심 내기 게임을 하던 회사 동료들, 허리도 무릎도 심장도 건강하던 부모님, 지금과 다른 겨울, 지금과 다른 눈. 그러면서 가끔은 ‘인생이란 뭘까?’라는 터무니없는 질문도 해보게 되는 것이다.

바람이 부는 난바다를 떠가는 배 위에 동양인 청년이 두 손으로 모자챙을 잡고 서 있다. 단추가 많이 달린 무겁고 커다란 검정 외투를 입었다. 추운 밤에 이불로 쓸 만한 외투다. 외투 깃 안으로 목이 꽉 끼도록 단추를 채운 하얀 와이셔츠와 넥타이가 보이고, 외투 아래로는 툭툭한 통바지와 투박한 구두가 보인다. 청년의 이목구비는 오밀조밀하다. 그가 떠나온 고향 마을이나 논밭 사잇길처럼, 매일 음식을 담는 그릇처럼, 고목이나 괴석에 손을 모으는 어릴 때의 기도처럼. 배경이 되는 강한 바람과 성난 파도, 희끄무레한 하늘도 청년을 닮았다. 바람과 파도와 하늘처럼 청년 역시 불안하다. 청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망망대해를 항해해 낯선 곳으로 가는 중이다. 불안과 기대가 엿보인다. 나침반은 철새처럼 태어날 때부터 몸 안에 간직하고 있다. 앨런 세이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할아버지의 긴 여행>의 표지 그림이자 책 속의 두 번째 그림은 그렇다.

동화책과 그림책을 유독 좋아하는 와이프의 방에서 이 책을 빼내는데 함께 있던 스무 살이 된 딸이 머리를 갸웃했다.

“옛날에 읽었는데 도대체 왜 칼데콧상을 받았는지 이해가 안 돼.”

1994년 ‘칼데콧상’과 보스턴 ‘글로브 혼 북상’을 수상한 <할아버지의 긴 여행>은 열다섯 살에 미국으로 이민을 간 저자 앨런 세이의 자전적 이야기다. 책 속의 청년은 일본에서 태어나 세계구경을 떠나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햇빛과 한적한 바닷가를 사랑하게 된다.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해 살면서 자라는 딸을 보고 자연스레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결국 옛날 친구들과 고향의 산과 강이 그리워 일본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이제는 캘리포니아의 산과 강이 그립다. 캘리포니아에 한 번 다녀오기로 마음먹지만, 전쟁이 터지면서 수포로 돌아간다. 유언처럼 캘리포니아에 꼭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할아버지가 죽은 후, 손자인 ‘나’는 청년이 되어 할아버지처럼 캘리포니아로 여행을 떠나고 그곳에 정착하게 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나라에 있으면 저 나라가 그립고,
저 나라에 있으면 이 나라가 그리워진다는 것입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일본의 고향에 번갈아 살면서 떠나온 곳을 그리워하다 늙어 죽는 <할아버지의 긴 여행>의 내용은 단조롭고 문장은 평범하다. 너무 담담해서 조서라도 꾸미고 싶어진다. 앨런 세이는 그런 인생의 순간들을 기품 넘치는 색채로 몇 단계 높은 차원에서 그려낸다. 책장을 덮는 순간, 감당하기 힘든 질문이 망망대해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질문은 무거웠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림과 이야기마다 지나간 시절이 떠올랐다. 태평양의 뱃전에 선 청년의 모습에서 10년 전, 가족과 함께 한국을 떠나던 비행기 안의 풍경을, 전쟁의 폐허 위에 서 있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내가 경험한 가난한 동아시아 마을들과 쓸모없이 버려진 현재의 고향 마을을 생각했다.

동양인 청년은 첫 양복을 입고 태평양을 떠가는 증기선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상상해본다. 먼 곳에서 불어오는 낯선 바람을 맞으며 기대에 부풀고, 끝없이 검푸른 바다를 보면서 불안에 떨었겠지. 사람들 틈에 끼여 거대한 배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고향을 지우고, 밤하늘에 꽃처럼 핀 별들을 올려다보면서 고향을 그리워했겠지.

인생은, 이라고 말하고 싶어도 나는 인생을 끝까지 살아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른다. 또 누군가의 인생 전부를 지켜본 경험도 없다.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고, 할머니의 인생 중 나와 겹치는 부분은 채 3할이 되지 않는다. 아버지나 어머니의 젊은 시절도 몇 조각밖에 모른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제 인생도, 남의 인생도 끝까지 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에 대해 영원히 알 수 없구나’ 하고 씁쓸하게 뇌까려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도중, 삽화를 그리기로 한 딸이 방문을 빠끔 열었다.

“아빠, 책이 너무 좋은데?” 책을 처음 읽었을 때와 달라진 것이다.

딸은 그리고 나는, 그 사이에 어떤 인생을 선택해왔을까? 아니 그건 중요하지 않다. 캘리포니아에 살든 고향에 살든,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그리워할 테니까. 얻는 게 있었다면 잃는 것도 있으니까. 다만 ‘얼마나 많은 선택의 기회를 가졌는가?’는 중요하다. 좋은 세상은 사람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는 세상이다. 나쁜 세상은 선택의 자유가 없는 곳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진짜 별로다. 어쨌든 미라보다리와 금문교 아래로, 성산대교와 잠실대교와 한강철교 밑으로 시간은 흘러간다. 그리워할 것들은 더 늘어나는 반면에 선택할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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