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슬로우 푸드 통밀 당근 머핀

밀양댁 엄마 손 밥상
글과 사진 이미라

완벽한 슬로우 푸드 통밀 당근 머핀

지난봄 염색학교에 들렀다가 밀 한 가마니를 얻어왔다. ‘꽤’와 ‘꽥’이라는 이름을 가진 거위 두 마리의 양식이기에 가져오기가 미안했지만, 남해에서 유기농으로 경작한 밀이라는 말에 이기심이 발동했던 것이다. 녀석들에게 서너 가마니를 남겨두고 한 가마니를 챙겨오긴 했는데 도대체 이걸 어떻게 먹을지가 문제였다. 우선 밀을 갈아서 밀가루를 만들 수 있는지 동네 방앗간을 찾았다. 하지만 밀가루처럼 곱게 제분하는 기계는 없다고 했고, 근처 다른 방앗간도 마찬가지였다. 밀가루를 직접 갈아서 건강한 빵과 과자를 만들어주겠다고 큰소리쳤는데 시작부터 나의 계획은 어긋나고 말았다.

그러다가 문득 여행지에서 먹었던 밀싹 주스가 떠올랐다. 싹이 튼 밀이 약 10cm 정도 자라면 과일과 함께 갈아서 주스로 만드는데, 항암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임파선에 쌓인 노폐물을 제거한다고 한다. 날것으로 먹어야 하기 때문에 밭에서 키우지 않고 화분에 키워 볼 요량으로 밀을 뿌려두었는데, 희한하게도 이 녀석들이 금세 자랐다. 비록 곱게 간 후에도 특유의 까칠한 식감이 느껴지고 풋내가 나는 듯하지만 아침마다 밀싹을 한 줌씩 넣어 주스를 만들면 더 건강하고 신선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주스도 만들어 먹고, 밥을 할 때 한 줌씩 밀을 넣어 먹기도 했지만 큰 가마니에 담긴 밀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그런데 남편이 일을 벌였다. 평소에 가스레인지도 켤 줄 모르는 남편이 제빵을 하겠다고 제분기를 주문한 것이다. 바가지를 긁고 싶었지만, 악기든 운동이든 독학으로 배우는 것을 취미로 가진 남편이기에 그의 새로운 도전을 막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민망한지 전자동 제분기는 너무 비싸서 수동을 샀다며 멋쩍어했다. 바가지 대신 잔소리를 쏟아내며 함께 밀을 씻고 말리면서 제분기를 사용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닷새를 말린 밀은 만졌을 때 꼬들꼬들한 것이 목욕시켜놓은 아기처럼 개운한 모습이었다. 드디어 수동 제분기를 돌릴 차례가 왔다. 밀을 한가득 붓고 맷돌을 갈듯 제분기의 핸들을 돌리기 시작했다. 베이지색이던 작은 밀알들이 하얀 가루로 바뀌어 떨어졌다. 신기한 기분도 잠시 더디게 돌아가는 제분기를 보고 있자니 갑갑해지기 시작했다. 저걸 언제 다 갈아서 빵을 만들까 싶어 성격 급한 나는 투덜거리며 지켜보았다. 하지만 남편은 차분하게 갈고 또 갈더니, 스피드를 내어서 돌리면 더 잘 갈아진다는 진리를 터득하고 어느새 머핀 12개 분량을 만들 수 있는 양의 밀가루를 갈았다. 코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채 “이걸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하지, 아니면 힘들어서 못 하겠다”라며 웃었다. 나는 “그냥 우리밀 밀가루를 사면 간단한 것을 왜 이렇게 사서 고생하는지 모르겠네”라고 눈을 흘기면서 당근 머핀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당근 머핀은 아이들에게 간식으로 자주 만들어주던 것으로 버터 대신 포도씨유를 사용한다. 머핀으로 만들면 몸에 좋은 당근을 듬뿍 먹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당근에 많이 들어 있는 지용성 비타민의 흡수율을 높일 수 있다. 100% 통밀가루로 머핀을 만든 적이 없어서 살짝 걱정이 됐지만, 발효과정이 필요한 빵보다는 머핀이 남편에게 수월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밀가루, 포도씨유, 베이킹파우더, 당근, 달걀, 설탕, 꿀을 준비하고 오랜만에 핸드 믹서도 꺼냈다. 달걀을 잘 풀고 설탕을 조금씩 넣어가면서 핸드 믹서로 잘 저어주는데, 설탕이 잘 녹아야 머핀이 잘 부풀어 오르고 식감이 좋다. 달걀과 설탕이 잘 섞이면 노르스름한 색이 나면서 커스터드 크림처럼 변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포도씨유를 조금씩 나누어 부어주면서 섞는다. 여기까지만 잘하면 머핀 만들기는 대략 성공이다. 여기에다 강판에 갈아놓은 당근과 밀가루, 베이킹파우더를 넣고 주걱으로 가볍게 섞는다. 반죽을 머핀 틀에 나누어 붓고 180도에서 25분 구워주면 당근 머핀이 완성된다. 비록 반죽이 튀고 바닥이 밀가루 투성이 됐지만, 처음 만든 머핀치고는 굉장히 성공적이다. 당근 머핀과 가장 잘 어울리는 크림치즈를 토핑으로 올리니 더 그럴싸해 보였다.

따끈할 때 당근 머핀 하나를 나누어 먹어보기로 했다. 과연 어떤 맛일지 궁금한 나머지 설레기까지 했다. 조심스럽게 한 입씩 맛보던 우리는 서로 눈이 마주치자 웃음을 터트렸다. “맛있나?”라는 나의 물음에 “어, 굉장히 건강한 맛이다”라는 남편의 대답. “밥으로 치면 이건 누룽진데?” 나는 꼭꼭 씹어서 먹어야 하는 머핀의 식감에서 누룽지가 떠올랐다. 1시간을 넘도록 수동 제분기를 돌려서 만든 통밀가루는 머핀으로 변신한 다음에도 그 강단을 지니고 있었다. 우유와 함께 한 입 베어 먹으면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머핀들과는 달리 꼭꼭 씹으면서 그 고소함을 음미해야 하는 개성 강한 머핀으로 탄생했다. 만드는 과정이 더딜 뿐만 아니라 먹을 때도 천천히 먹어야 하는 진정한 슬로우 푸드 머핀이다.

남편은 “아빠가 만든 첫 머핀이다”라고 아들 녀석들에게 당근 머핀을 내밀었다. 아이들은 아빠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걸 한 번도 본 적 없는 터라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 녀석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당근 머핀을 맛본다. 그 반응이 예사롭지 않다. “딱딱해요”, “돌을 씹은 것 같은데 안에 돌 들었어요?” 예상하고 있던 답변이지만 조금은 당황스러웠고, 일단 다 먹은 다음에 또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했다. 후딱 먹어치운 녀석들은 “딱딱하긴 하지만 고소하고 향이 좋아요”, “크림치즈를 듬뿍 올려 먹으니까 머핀이랑 너무 잘 어울리네요, 맛있어요”라고 접대용 멘트를 날려준다. 하지만 나는 녀석들의 반응이 아빠를 위한 연극이 아님을 안다. 내가 음식을 만들어줘도 뭐가 부족한지, 어떤 재료가 빠졌는지 금방 알아채는 아이들이다. 맛없으면 하나를 그렇게 빨리 먹어치우진 못했다. 정성이 가득한 머핀이 어찌 맛없을 수 있을까?

슬로우 푸드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하루였다. 밀을 씻어서 말리는 닷새를 접어두고서라도 12개의 머핀을 만들기 위해 주말 반나절을 고스란히 바쳤다. 밀을 갈고, 반죽하고, 머핀을 굽고, 식힌 후 크림치즈를 올려주는 과정을 거치면서, 빵집에 들러 사 오면 10분이면 될 일을 위해 이렇게 긴 시간을 쏟아 부어야 하는지 짜증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과정을 즐기는지, 아니면 즐기는 척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서툴게 해나가는 남편을 보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뭐가 그리 마음만 급해서 자꾸만 조급증이 생기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만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를 자꾸 볶아치고 있었던 것이다. 천천히 느린 속도로 살기 위해 전원주택으로 이사까지 왔지만 아직 내 마음속에는 번잡하고 급한 성미가 꽁꽁 숨어 있었던 것이다.

고작 머핀을 만들었을 뿐인데 피로가 몰려왔다. 그런데 남편은 또 수동 제분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안 피곤하나? 한꺼번에 하지 말고 다음에 또 해요”라고 해도 남편은 낑낑거리면서 빠른 손놀림으로 밀을 갈았다. “빨리 빵 만들 만큼 밀가루 갈아놓고 발효종도 만들어봐야지, 다음에는 표면에 크랙이 쫙쫙 생기는 통밀빵을 만들라꼬”라며 앞서나간다. 이 사람이 진짜 발효종이 뭔지나 알고 얘기하는 건가 싶다가도 결국은 좋아하는 일에 푹 빠지는 남편이 부러웠다. 힘들지만 그 과정을 즐기는 것이 음식으로 우리 몸을 살찌우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고 필요한 순간임을 깨달았다.

항상 가족들에게 건강한 밥상을 차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매일 열심히 밥을 지었다. 그런데 과연 내가 그 순간을 진정으로 즐겼는지 돌이켜본다. 투덜대면서 12첩 반상을 차리기보다는 소박한 밥상이라도 정성껏 즐거운 마음으로 차릴 것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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