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코리언 우먼스 북클럽의 연말 파티

현경의 뉴욕 스토리
글과 사진 현경

뉴욕 코리언 우먼스 북클럽의 연말 파티

코리언 우먼스 북클럽(Korean Women’s Book Club)의 연말 파티는 해마다 스페니쉬 할렘에 위치한 이지수 옹주님의 댁에서 열린다. 흑인들과 남미 계통 히스패닉들이 주로 모여 사는 스페니쉬 할렘에 옹주님이 사시지 않는다면 아마도 인종차별적 무의식을 가진 한국 이민자들은 이 동네에 오지 않을 것이다. 많은 한국 이민자들은 알게 모르게 자신들이 백인에 가깝지 ‘가난하고 무식한’ 흑인들이나 히스패닉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런 우리 안에 있는 인종 차별적 생각들은 LA 폭동이 일어났을 때 처참하게 깨졌다. 미국의 경찰들은 LA 일본 타운인 리틀 도쿄(Little Tokyo)로 쏜살같이 달려가 일본계 미국인들은 지켜줬지만, 한인 타운은 전혀 지켜주지 않았다. 한인 타운의 가게들로 폭도들이 몰려와 물건들을 가져갔고, 불을 질렀으며, 자신들의 재산을 보호하고 싶었던 한인 가게 주인들은 총을 쏘며 가게를 지켰다. 이런 폭동 속에서 한국 이민자들의 가게들은 쑥대밭이 됐고 사람들이 죽기도 했다.

한국 이민자들의 인종에 대한 의식이 근본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다. 한국인은 미국에서 백인이 아니고 흑인에 가까운 유색 인종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그러나 일본인들은 백인으로 여겨진다. 말도 안 되는 인종에 대한 편견이지만 사람들의 문화적 무의식은 이렇게 근거 없이 결정적 순간에 현실로 나타난다. 남아공화국에 인종차별 시스템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가 있을 때도 일본인은 백인으로, 중국인과 한국인은 유색 인종으로 공식 문서에 등록됐다. 일본의 국가, 경제, 문화 권력은 그들이 한국인이나 중국인과 같은 피부 색깔을 가졌으나 그들을 백인으로 만들어줬다. 세계 역사를 공부할수록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리석음에 가슴 한복판에 총 맞은 느낌으로 존재가 휘청거리는 경험을 한다.

오늘의 파티 호스트인 이지수 옹주님은 조선 의친왕의 따님이시다. 50년 전 40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유학을 와 미생물학으로 박사를 받고 오랫동안 뉴욕의 유명한 암병원인 슬로운 케더링 호스피털에서 연구원으로 일하셨다. 에이즈 치료약을 만들어낼 정도의 훌륭한 과학자셨다. 세계적 과학자들과 함께 실험 연구를 하다 그들이 자신의 명예, 돈과 권력을 위해 제약회사와 짜고 실험 결과를 조작하는 걸 보고 그 ‘좋은’ 직장을 미련 없이 나오셨다. 같은 정의감을 가진 연구원들과 함께 옹주님은 대안적 실험실을 만들려고 매일 사람들이 총격전으로 죽어가는 스페니쉬 할렘의 다 허물어져가는 폐교를 겁도 없이 사셨다. 진실한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우주의 뜻은 달랐나 보다. 뉴욕시는 실험실에 필요한 전기 용량을 주택가라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고 이에 실망한 과학자들은 꿈을 포기하고 떨어져 나갔다. 이 집을 산 모든 빚은 옹주님이 떠맡게 됐다. 직장도 그만둔 옹주님은 할 수 없이 이 폐교를 40여 채의 아파트로 바꾸는 공사를 맨손으로 시작했고 몇 년에 걸쳐 그 힘든 공사를 마무리하셨다. 그 아파트 단지가 완성될 무렵 스페니쉬 할렘이 뜨기 시작했고 옹주님은 인생 계획에 없던 큰 부동산 부자가 됐다. 거기서 생긴 돈으로 옹주님은 중남미 니카라구아에 뉴욕 맨해튼 크기의 땅을 사서 그곳을 영원히 개발할 수 없는 자연보호지역으로 만들었다. 그녀의 꿈은 그곳에 백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다음 세대 인류의 아이들에게 산소를 유산으로 물려주는 것이다.

일생을 독신으로 사신 옹주님의 경계 없는 사랑이다. 올해 옹주님은 애쓰셔서 니카라구아 자연보호지역에 작은 에코 호텔과 리트리트 센터를 지었다. 현대의 물질문명에 지친 사람들이 찾아와 청정 자연을 경험하고, 공부하고, 치유받고 가는 자연 성지를 만든 것이다. 40달러를 달랑 들고 뉴욕에 유학 와 이불도 못 사고 신문지를 깔고 덥고 자던 조선의 마지막 옹주는 50년의 세월을 거치며 자신의 조그만 왕국, 생명평화의 왕국을 니카라구아 시골에 세우셨다. 크기가 가늠되지 않는 내적 창조력의 표현이다. 누구도 동물을 사냥하거나 낚시를 하거나 나무를 자를 수 없는 곳. 많은 철새들과 여러 종의 동물들이 사냥을 피해 옹주님의 자연보호 성지로 몰려든다.

그들처럼 뉴욕에서 다양한 일을 하며 여러 종류의 가족 관계를 가진 한인 이민 여성들도 1년에 한 번씩 스페니쉬 할렘 옹주님의 궁전인 그녀의 펜트하우스로 모여든다. 그녀의 집은 우리가 선택한 삶의 다양성이 판단 없이 사랑으로, 고요함으로, 경계 없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곳이다. 옹주님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려고도, 가르치시려고도 하지 않으신다. 그냥 그 자리에서 넉넉함으로, 지혜로, 자유로, 독립으로, 창조성으로 생명력을 뿜으시며 웃고 계신다. 우리는 그녀의 매력에 끌려 해마다 옹주님의 펜트하우스에 모여 온갖 표현을 하며 함께 신나게 논다. 올해 북클럽 연말 파티의 주제는 ‘동화 속 주인공’이다. 동화 속에 나오는 한 캐릭터를 정해 그 분장을 하고 나타나 놀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같이 읽는 책은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다. 아마 이 책을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읽었던 것 같다. 40년도 더 된 일이다. 우리는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맞으며 짧고 깊고 순수한 책을 읽고 싶었다.

   

벌써 코리언 우먼스 북클럽이 생긴 지 10년이 됐다. 우리는 그동안 100여 권이 넘는 세계의 고전들과 명작을 한 달에 한 번, 네 번째 화요일에 모여 읽었다. 자칭 ‘화․사(네 번째 화요일)’ 모임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에서 그녀의 입을 빌어 말했듯이 우리는 책을 통해 ‘이 구질구질하고 지루한’ 이민자의 일상을 벗어나고, 초월하고 싶었던 것 같다. 샌드위치를 팔다가, 부동산을 소개하다가, 유치원 셔터를 내리다가, 한국 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치다가, 돈 안 되는 예술 작품을 만들다가 한 달에 한 번씩 유니온 신학대학원의 오래된 교실에서 ‘화사하게’ 만났다. 100년 넘은 학교 건물에 들어서면 우리는 바쁜 이민자의 일상을 뒤로하고 달력에 없는 시간과 공간 속으로 함께 들어갔다. 모든 걸 멈춘 뒤 깊은 숨을 쉬고 우리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작가들의 세상으로 순간 이동했다. 그곳엔 영국의 여왕이, 아프리카의 노예 여성이, 인도의 여성 작가가, 한국 독립운동가 세 여자가, 독일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테스가, 사막의 연금술사가, 어린 왕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마치 AR(증강현실) 속으로 걸어 들어가듯 그 현실 속에 들어가 책의 주인공들과 만났다. 그들 삶의 고통과 황홀함에 빠져들어 함께 웃고 울었다. 그들은 우리 삶의 모습을 비쳐주는 거울들이었다.

10년 동안 만나서 100여 권의 책을 읽으며 우리도 참 많이 변했다. 자기표현을 전혀 안 하고 자폐적으로 살던 친구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오래된 문화적 매뉴얼의 유효 기간이 지났다. 좁은 교회의 가르침, 유교적 무의식 속에서 여성으로, 이민자로, 유색인종으로 조심하며 조용하게 살던 우리의 일상이 책들과 만나며 서서히 무너져내렸다. 이 과정에서 우리 각자는 한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직업인으로서 따로 또 함께 성장해나갔다. 처음에 느꼈던 서로의 다름에 대한 경계심, 불편함, 이해하기 어려운 관점들이 서서히 사라져갔고 ‘우리는 참 다르고도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됐다. 우리는 이제 서로를 말없이 격려하고, 서포트하고, 포용한다. 무엇보다 모국을 떠나 뉴욕이라는 꿈의 도시에 정착해 사는 이민자로서의 삶의 고단함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우리는 동포’다. 그리고 100여 권의 책의 무게와 함께 같이 성장하고 늙어가는 우리 모습들에서 존재 자체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느낀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작게나마 우리보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여성들을 돕고 있다. 시작하는 예술가에게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비용을 대주기도 하고, 유기농 화장품을 개발하고 싶은 아프리카에서 온 젊은 여성에게 창업할 수 있는 종자돈을 주기도 했다. 남북 평화운동을 하는 동료를 돕기도 했고,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부도 한다. 우리가 책에서 받은 선물을 세상과 나누는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이지만 이 화사한 모임은 우리에게는 ‘생명줄’ 같은 자매애의 공간이 됐다. 우리는 이렇게 책과 함께 뉴욕의 바람을 맞으며 또 피하며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오늘 우리 회원들이 입고 온 옷을 보고 많이 웃었다. 백설공주, 빨강머리 앤, 캔디, 미니마우스, 이집트의 여왕, 마녀…. 나는 ‘내가 앞으로 쓰고 싶은 동화’의 주인공 복장을 하고 갔다. 요정 같은 가이아 여신! 모든 동식물과 인간이 안전하고 풍요롭게 살 수 있기를 돕는 가이아 여신. 내 인생에 소원이 있다면 <어린 왕자>, <갈매기의 꿈>, <연금술사>, <아낌없이 주는 나무>, <꽃들에게 희망을> 같은 단순하고 깊고 아름다운 ‘어른을 위한 동화’를 쓰는 것이다. 요정 같은 가이아 여신이 허물어져가는 현재의 가부장적 신자유주의 폭력의 문명을 넘어 새롭게 동터 오는 생명살림 문명에 대해 뭐라고 예언하고 어떤 신호를 보내줄지? 나도 많이 궁금하다. 아직 그녀의 메시지를 받지 못했지만 나는 오늘 그녀를 상상하며 옷을 입었다. 씨는 뿌려졌다. 이제 기다림 속에서 물을 주고 햇빛 같은 나의 생명 에너지를 쏟아 부으면 언젠간 싹이 틀 것이다. 한 알의 도토리가 커다란 도토리나무가 되듯이 말이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 뉴욕 코리언 우먼스 북클럽의 많은 멤버들이 100권의 책과 만난 후 이제 자기 인생의 ‘그 한 책’을 쓰기를 열망한다.

우리의 열망이 열매 맺기를 기도한다. 그녀들, 책, 글쓰기가 칼바람 부는 회색 도시 뉴욕에서 나를 따뜻하게 지켜준다. 그녀들에게, 조선의 마지막 옹주님에게, <어린 왕자>와 함께한 동화 속 모든 캐릭터들에게 고맙다. Merry Christmas & Happy New Year, Dear My Friends. and Gracias a la Vida(내 삶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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