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친구

꽃과 잎사귀와 문장들
글과 사진 박소언

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친구

추위가 시작되던 무렵, 나는 겨울로부터 도망치듯 더운 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몇 가지 우연들이 겹쳐 그곳에서 한 친구를 만나게 됐고, 그와 마주 앉아 얘기 나누던 시간들이 여행에서의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사람. 나와는 모든 게 달라서 다르다는 말조차 별로 쓸모가 없어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이야기가 시작되면 이미 또렷한 눈을 더욱 선명하게 뜨고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어떤 때엔 목소리가 높아지고, 큰 팔도 이리저리 휘젓는다. 나는 우리말로 얘기할 때에도 단어를 고르는 데에 넉넉히 시간을 쓰는 데다가 곧잘 더듬거리기도 하기 때문에, 내 쪽의 이야기는 그보다 더 오래 걸려 입 밖으로 나왔다. 그러면 그는 걸음마를 막 뗀 아이를 보듯 다정히 기다려주다가도, 다시 자신의 차례가 되면 급행열차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 나간다. 걸음마를 막 뗀 아이와 급행열차를 탄 사람이라니, 방향이 같더라도 ‘함께’라고 할 수 있을까 싶긴 하지만 말의 도구에는 언어 외의 것도 있으니까 우리는 그럭저럭 한 곳에 있었다.

그곳을 떠나면서 나는 그와는 좀처럼 닮은 구석을 찾을 수 없는 엽서를 선물했다.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사양> 중에는 ‘우리의 삶은 행복의 발소리를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를 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요지의 글이 있다. 나는 그 글이 몹시 좋아서, 나도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서 그 글을 엽서로 만들었다. 한글로 쓰인 글에 대한 설명을 마치자마자 그는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진지한 얼굴로 힘주어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나는 문장의 뜻을 좀 더 깊게 전달하려 애써보다가, 그만 포기하고 씩씩하게 나아가는 그의 급행열차를 가만히 따라가봤다.

어디로든 열심히 걷고 있는 줄 알았는데, 문득 주변을 살펴보면 같은 곳에 서 있는 걸 알아차리게 되는 때가 있다. 그때의 나는 원을 그리며 걷고 걷다가 다시 제자리로 온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던 걸까. 그렇다면 그곳에 가만히 서서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 다시 이곳의 겨울로 돌아와, 어쩌면 그리 새롭지 않은 이야기를 자꾸 되돌아본다. 여태 꼼짝 않던 내가 이제 겨우 한 걸음을 막 디뎠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오래 걸렸고, 까마득하게 긴 걸음.

때로는 이렇게 기다리지도, 예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나를 먼 곳으로 데려다준다. 다만 한 번 만났고 아마 앞으로 영영 만날 수 없겠지만 나의 좋은 친구가 되어준 그에게 고맙다고,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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