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김민정 시인의 세상 어디에나 詩
글과 사진 김민정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눈이 내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춤추며 내리는 눈송이에

서투른 창이라도 겨눌 것인가

아니면 어린 나무를 감싸 안고

내가 눈을 맞을 것인가

 

저녁 정원을

막대를 들고 다닌다

도우려고.

그저

막대로 두드려주거나

가지 끝을 당겨준다.

사과나무가 휘어졌다가 돌아와 설 때는

온몸에 눈을 맞는다

 

얼마나 당당한가 어린 나무들은

바람 아니면

어디에도 굽힌 적이 없다―

바람과의 어울림도

 

짜릿한 놀이일 뿐이다

열매를 맺어본 나무들은

한 아름 눈을 안고 있다

안고 있다는 생각도 없이.

 

詩人 울라브 하우게

詩集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봄날의책, 2017

 

파주에 산다. 산 지 다섯 해를 넘겼다.

다섯 번의 겨울을 보낸 셈이다. 그리고 여섯 번째 맞이한 파주의 겨울. 파주, 라는 이름이 처음부터 좋았다. 받침이 없어 더욱 그러하였다. 몸에서 있는 힘을 다 뺀 것 같은 없음. 그래서 욕심을 모르는, 욕심을 가져봤자 소용이 없는, 그런 없음의 태생을 가진 미친 자연, 특히나 눈. 파주에 눈이 쏟아지면 그 많던 차들은 일순 어디론가 숨어들고 내가 걸음 할 수 있는 길들마다 긴긴 침묵이 사방에서 내리꽂힌다. 침묵 위에 침묵은 흰 돌무덤을 이루기에 충분하다. 그렇게 쌓인 눈의 주검을 주운 나무막대를 지팡이 삼아 탁탁 쳐대며 걸을 때 다시 알게 되는 내 안의 천진, 그리고 무구의 자유로움. 그때 나는 일순 눈의 있다 없음이라는 재어봤자 소용은 없을 테지만 분명한 그 무게감을 처음 알게도 되는 바, 그 즉시로 미처 몰랐던 나의 재발견으로 남이 아닌 나를 처음으로 유심히 관찰하게도 된다. 왜 소복 쌓인 눈 위에 내 이름은 못 쓰고, 내 고양이의 이름은 쓸 수 있는가. 왜 수북 눈이 고인 나무 밑동은 못 치고 간신히 눈을 머리에 얹고 있는 나뭇가지는 탈탈 터는가. 왜 자꾸만 수줍은 듯하면서도 눈치 없이 눈치 모르게 무언의 어떤 행동들을 하고 있는가. 예측이 안 되는 부지불식간의 내 유일의 이렇다 할 ‘함’을 집에 들어와 맞은 눈을 털며 떠올릴 적에 분명해지는 한 가지 생각은 있다. 그래, 자연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어리지. 노르웨이의 국민 시인이다 할 울라브 하우게의 시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를 겨울이면 왜 외고 다니는가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라는 전언에 기대기 위해서다. 할 수 있어야 하고 해야만 한다는 강박은 우릴 얼마나 당당하지 못하게 하는가. 그리하여 우리의 무릎은 구리에 살을 입힌 것도 아니면서 얼마나 자주 구부러지곤 하던가. 눈이 올 적에 ‘춤추며 내리는 눈송이’를 하염없이 그저 보고만 있을 수 있는 우리들 어린 날의 ‘아이’를 우리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눈’을 놓고 ‘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눈’이 되어보는 일체. ‘어림’은 그걸 가능케 했었는데, ‘어림’에게는 그게 그냥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는데 그렇지 않은가, 눈밭에서 뒤엉켜 한몸으로 뒹구는 연인들도 그 만남이 ‘어림’일 적에는 스스로 그러하였건만 어느 순간 그 둘은 눈 한 송이 안 맞고자 악착같이 검정색 골프장 우산 속에 제 두 몸을 가리기에 급급하며 늙어가고 있다….

눈이라, 이 있다 없음의 그러니까 그러하기에 무시무시한 영원이라. 온몸으로 정면으로 눈을 맞아보는 이 겨울을 한번 보내보리라. 하우게라는 시인이 우리에게 준 많은 것 가운데 하나가 그 무방비의 ‘어린이’가 아니던가. 어떤 병증도 없이 단지 열흘 동안 먹지 않음이라는 옛날 방식으로 제 스스로 자연이 된 하우게의 뒤를 그리하여 나도 조금은 흉내를 내어보리라. 살짝 미친 살찐 망아지처럼 내리는 눈발에 춤을 추어본들 무슨 큰일이겠는가.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쪄도 좋으리라. 단 뼈만 부스러지지 않을 무게로만 주저앉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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