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지만 닮은 친구와 함께해 특별했던 아르헨티나 여행

예측불허 아르헨티나 여행기 2
글과 사진 긴수염

다르지만 닮은 친구와 함께해 특별했던 아르헨티나 여행

정들었던 우수아이아와 작별할 시간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일정이 꼬여버린 덕분에 꿈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세상 끝 마을. 며칠 더 지내고 싶지만 예약해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아르헨티나 중서부에 위치한 멘도사로 가야 한다. 버스로 2박 3일을 달려야 한다니 갑자기 아득해졌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 어느 마을에서 환승한 뒤 건초지대를 달렸다. 버스를 탄 채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고 국경을 넘어 칠레에 잠깐 건너갔다가 다시 아르헨티나로 건너와서 주구장창 달렸다. 지평선에 걸리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마치 흙으로 된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기분이 들었다. 간혹 로드킬로 죽은 동물이나 무언가를 추모하는 꽃무덤 같은 것들이 보였다. 명복을 빌며 저미는 마음을 추슬렀다.

북쪽으로 이동할수록 점점 더워지더니 저 멀리 안데스 산맥이 희미하게 보이는 가운데 드디어 멘도사에 도착했다. 장거리 이동으로 초췌해진 우리는 호스텔에 짐을 풀고 맥주 한 잔 마시며 기운을 차렸다. 이어서 친구가 꼭 하고 싶어 했던 와이너리 투어를 갔다. 뜨거운 태양 아래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이 와인 저 와인 시음하니 이내 몽롱한 기운이 온몸에 퍼져나갔다. 사람 키보다 더 큰 모형 와인병을 붙잡고 난리부르스를 치며 활짝 웃는 친구를 보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호스텔에 돌아와 바텐더가 부어주는 데킬라를 연거푸 들이켰다. 손등에 레몬을 바르고 소금을 뿌려 핥아먹는 조합이 환상적이다. 하루 종일 술을 섞어 마시고 기분 좋게 취한 우리는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이튿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비행했다. 긴 삼각형을 그린 여행의 마무리는 여유롭게 하기로. 그 와중에 틈나는 대로 음식점과 카페와 바를 돌아다녔다. 언젠가 자기만의 바를 오픈하겠다는 꿈을 갖고 요리를 업으로 하고 있는 그는 그런 것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그저 따라다닐 뿐. 혼자였다면 가지 않았을 곳들을 친구 덕분에 가게 됐다. 어딜 가나 맛있는 음식이 나왔고, 좋은 커피와 다양한 술이 있었다. 어쩌면 친구가 괜찮은 곳만 찾아낸 것인지도. 아니면 내 미각의 관용도가 넓은 것일 수도 있고. 어딜 가든 인상적인 그림들과 소품들에 눈이 휘둥그레. 친구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찬찬히 공간을 음미한다. 어두컴컴한 바에 마주 앉아 불붙은 에머랄드빛 압생트를 마시자 목이 확 타오르고 친구의 어깨 너머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랭보의 환영이 보이는 듯하다. 아무래도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 같다.

알록달록한 라 보까(La Boca) 거리에 당도하자 멋들어진 탱고 음악이 나를 끌어당긴다. 곳곳에서 다양한 탱고 연주를 배경으로 무희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식사나 음주를 하면서 공연을 감상하고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무희들과 탱고 포즈를 취하며 기념촬영을 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우리는 거리의 끝까지 걸어보고 가장 마음에 드는 무희들이 있던 곳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도 역시 낄메스 맥주! 음악에 취하는 건지, 술에 취하는 건지 알 수 없이 마음이 들떴다. 한편으로는 폐부를 찌르는 반도네온의 선율에 서글퍼지기도 했다. 공연을 마친 무희들이 사진을 찍자며 다가오자 긴장됐다. 탱고 포즈를 취하는 건 도저히 못하겠어서 친구와 함께 무희들과 어색한 모습으로 몇 장 남겼다.

생전 처음 보는 것들이 가득한 골목을 꼼꼼하게 구경했다. 그러다 곳곳에 개들이 늘어져 자고 있는 걸 보고는 그만 웃음이 터졌다. 사람이 지나가든 말든, 누가 말을 걸든 말든, 개들은 무념무상 잠에 취해 있다.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이곳 사람들이 개를 대하는 태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다 길거리에서 자연스럽게 개와 인간이 찍힌 장면이 담긴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사를 바라보는 눈빛들이 친근하다. 아르헨티나에서 내내 느꼈던, 길에서 사는 개들과 사람들이 어우러진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가격이 얼마든 간에 냉큼 구입했다.

숙소로 복귀하며 대로변을 걷다가 희한한 광경을 목격했다. 횡단보도 앞에 자동차들이 멈춰서면 사람들이 후다닥 뛰어와 공연을 하는 것이었다. 저글링 따위의 곡예를 부리거나, 공을 드리블하며 축구 실력을 뽐내는 등 각양각색이다. 그러고는 자동차에 다가가자 운전자들이 공연료를 지불하듯 잔돈을 건넨다. 통행이 많은 길목마다 게릴라 공연이 벌어지는 모습이 재밌었다. 버스에 탑승하자 팔목에 어린왕자 문신을 한 사람이 보였다. 너무 잘 어울려서 나도 모르게 ‘혹시 사진으로 당신을 기억해도 되겠느냐’ 물었더니 흔쾌히 포즈를 취한다. 우릴 보며 씩 웃는 그가 싱그러웠다. 버스에서 내리자 엄마 품에 안긴 아이가 나를 보며 빙그레 웃는다. 내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상냥한 미소는 확실히 사람을 무장해제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스르르 경계심이 풀리고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자꾸만 호감이 생겼다.

   

   

우수아이아는 내가 맡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친구가 맡았기에 그를 따라 다니는 내내 모든 것이 예측불허였다. 탱고의 거리 라 보까, 예술적인 묘지라는 레골레타, 오페라 극장을 개조한 엘 아테네오 서점, 각종 골동품이 쌓여 있는 상점들, 신기한 물건들이 즐비한 산 텔모 시장. 늘어나지 않는 마법의 주머니가 있었다면 가득 채웠을 것 같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흘러 다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자꾸만 새로운 것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지하철의 그림이나 벽에 있는 낙서조차도 예술적이었다. 중복을 좀처럼 느끼지 못했고, 도시를 이루는 개체들의 고유한 개성이 느껴졌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하나의 거대한 예술작품이었다.

마지막 밤에는 영화 <해피투게더>의 배경인 바 수르(Bar Sur)에 찾아갔다. 영화에 나왔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어, 그곳에 입장하는 순간 영화로 들어간 느낌이 들었다. 강렬하면서도 서글픈 탱고 음악과 정열적이면서도 다정한 무희들의 춤사위 그리고 질 좋은 와인에 취해 2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관광객들이 거의 빠져나가고 한산해진 바에 앉아 있으니 영화의 배경음악인 Astor Piazzolla의 Finale(Tango Apasionado)가 머릿속에서 재생됐고, 춤을 추고 있는 보영과 아휘의 환영이 보이는 듯했다. 오늘도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 같다. 친구와 마지막을 기념하며 좋은 호텔에 묵었다. 여기까지 하니까 사치란 사치는 다 부려본 느낌이 들었다. 다음 날 친구는 토론토로, 나는 캘거리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중간에 마이애미를 경유하면서 키웨스트에 들렀다. 양팔을 벌리면 바다에 닿을 듯이 좁은 도로를 달려 도착한 그곳에서 인상적이었던 곳은 헤밍웨이 생가였다. 육손을 가진 고양이들이 살고 있었는데 대대로 살다간 고양이들의 무덤도 있었다. 다른 곳도 둘러보려고 했는데 고양이 때문에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결국 고양이 곁에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다 허둥지둥 원점으로 돌아왔다. 삼삼오오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다가 문득 거울에 비친 혼자인 내가 쓸쓸해 보였다. 친구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로 혼자 여행을 다니는 편인데 오랜만에 누군가와 같이 너무 좋은 여행을 해서 후유증이 컸나 보다.

   

   

문명을 좋아하는 친구와 야생을 좋아하는 나. 취향이 많이 다르지만 우리는 공통적으로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충만하고 모험심이 강했다. 그래서 뒤틀어진 일정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예측불허의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예상할 수 없어 더욱 흥미진진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 후로 여행할 때 큰 그림만 그리고 자세한 것은 그때그때 그려 넣는 스타일로 서서히 바뀌게 됐다. 삶의 불확실성을 껴안고 일상에서 무뎌졌던 낯설음에 대한 감각을 깨우며, 지나치게 경계하지 않으면서 호의와 환대를 받아들이며, 혼자도 좋지만 여럿도 좋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서, 나는 야생을 좋아하지만 문명도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친구와 함께한 아르헨티나 여행은 나에게 많은 선물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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