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 우수아이아에서 만난 자연

예측불허 아르헨티나 여행기 1
글과 사진 긴수염

세상의 끝 우수아이아에서 만난 자연

연말에 2주의 휴가를 내어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캐나다 서부에 살고 있던 나와 동부에 살고 있던 친구가 아메리카 대륙 최남단에 있는 우수아이아에서 만나 여행을 함께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저렴한 항공권을 구했는지라 마이애미를 경유하면서 한갓진 공항에서 한 해의 마지막 밤을 지새워야 했다. 배낭에 누워 있던 나와 청소하던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가 환하게 웃으며 “¡Feliz Año Nuevo!(스페인어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란다. 벌떡 일어나 웃으며 화답했다. 썰렁하던 마음이 차올랐다.

새벽 비행기를 타고 저녁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했다. 시내 환전이 좋다고 들어서 밤늦게 굳이 시내로 이동했다.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자 옆에 있던 사람이 가방 단속 잘 하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열려 있는 창문으로도 채간다고.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주민이 당부할 정도로 심한 거라면 대체 얼마나 치안이 안 좋은 걸까. 하지만 빼앗겨도 그만인 것들인데 지나치게 경계하면 놓치는 게 많아서 우울할 것 같다.

1월 1일의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후텁지근했다. 살인적인 더위라더니 과연 그러했다. 게다가 나는 영하의 날씨인 캐나다에서 왔으니 오죽하랴. 더위 속에 무거운 배낭을 데리고 다니느라 지쳤는데 설상가상 호스텔로 걸어가는 길에 폭우가 쏟아져 우리 모두 쫄딱 젖었다. 축축한 배낭은 돌덩이 같았다. ‘아, 인생의 짐이여….’ 이럴 땐 맨 몸이고 싶다. 환전을 마치고 샤워한 뒤 잠깐 눈을 붙였다.

이튿날,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상황. 지금 막 날아온 친구와 함께 맥주를 마시며 비행기가 뜨기를 기다렸다. 몇 시간이 지나자 스페인어 안내 방송이 울려 퍼진다. 귀를 쫑긋 세우고 숫자에 집중했다. 친구가 먼저 타러 가고 사람들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어느새 텅 빈 공항. 이상해서 직원에게 문의하니 비행기가 5분 전에 이륙했다는 것이다. 털썩. 그런데 나 같은 인간이 옆에 하나 더 있었다. 네덜란드 사람인 그의 자전거와 나의 배낭은 이미 우수아이아로 떠나버렸다. 우린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비행기를 돌려달라고 애걸복걸. 직원들은 몹시 미안해하며 내일 뜨는 비행기의 일등석을 끊어주었다.

공항에 퍼질러 앉아서 우수아이아에 도착했을 친구에게 연락을 보내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친다. 친구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기체가 뜨려고 시도하다가 돌아왔단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공항 노숙 대신 시내 탐방. 초반부터 일정이 꼬였지만 오벨리스크 사거리에 있는 주점에 앉아 커다란 병맥주를 마시는 순간 모든 게 풀렸다. 아르헨티나 맥주가 맛있는 건지, 이 상황에서 마시는 맥주가 맛있는 건지. 친구가 있어 긴장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느낌이다. 스페인어로만 돼 있는 메뉴판을 보며 쩔쩔매는 것조차 재밌었다. 비로소 아르헨티나에 왔다는 걸 실감했다.

이튿날, 일등석에 누워 대륙의 끝으로 날아갔다. 비행기가 땅에 닿는 순간 모든 사람들이 물개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가운데 마음이 뭉클해졌다. 우수아이아 시내로 이동해 바로 엘 칼라파테로 가는 버스를 구하러 다녔다. 그러나 새해라 그런지 아무리 발품을 팔아도 티켓이 없었다. 다음 버스는 일주일 뒤에나 있단다. 모레노 빙하를 보고 싶었는데 연이 아닌가 보다. 엘 칼라파테는 깨끗이 포기했지만 멘도사-부에노스아이레스 비행기를 예약해둔 탓에 멘도사에는 반드시 가야 하는 상황. 다시 우수아이아에서 멘도사까지 가는 버스를 구하러 다녔다. 다행히 이틀 뒤에 버스가 있는데 2박 3일 동안 타야 한다.

식당에 들어가 배를 채우다 문득 동물이 느껴져 입구를 바라보니 빨간 목도리를 두른 커다란 펭귄이 나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다. ‘어라? 지금 이게 꿈인가 생신가!’ 얼떨결에 나도 인사하며 자세히 보니 펭귄 코스프레를 하는 인간이었다. 숙소로 가는 길에는 각양각색 수직으로 길게 자란 신기한 꽃들을 만났고, 길을 헤매는 우리를 마을 사람들이 도와주었다. 후텁지근했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마음이 서늘했는데 남극과 가까워 추운 우수아이아에서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가까스로 도착한 숙소의 전망은 환상적이었다. 뒤에는 설산, 앞에는 바다. 이보다 좋을 수 없다.

   

모든 것을 내가 계획했던 대로가 아닌,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가벼운 마음으로 찬찬히 마을을 돌아다녔다. 어슬렁거리는 개들이 자유로워 보인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도 그랬는데, 여기 사람들은 길의 개들이 뭘 하든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어떤 개는 길 한복판에 늘어져 있고, 어떤 개는 이 사람 저 사람 쫓아다니며 아는 체를 한다. 개가 길을 건너면 차들이 알아서 피하고 기다려주기도 한다. 어디선가 나타난 큰 개에게 반갑게 인사하자 그는 길 안내를 해주듯이 자꾸 돌아보며 어느 지점까지 동행하고는 돌아서서 사라져갔다. 꼭 다시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튿날, 동네 미용실에 가서 나는 덥수룩한 머리를 깎았고, 친구는 머리의 절반만 탈색을 했다. 둘 다 만족했다. 알고 보니 머리를 해주신 분이 미용실 사장님이고 월드 챔피언이란다. 은발과 금발이 섞인 머릿결과 직접 바닥을 빗질하는 모습에서 뭔가 포스가 느껴지더라니. 머리 손질을 마치고 같이 기념사진도 찍었다. 따뜻하게 포옹도 해주셨다. 마음이 뭉클했다. 융숭한 대접을 받고 기분이 한껏 고무된 우리는 낮술을 들이키며 여유를 부렸다. 식당, 카페, 바 등등 소화되는 족족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맛보고 즐겼다. 숙소에서 또 와인을 마시고 계속 취한 상태로 다녔다. 그리고 전날 만났던 개를 우연히 또 만났다. 나를 보고 슬며시 아는 체를 한다. 내심 몹시 기뻤다.

그다음 날, 펭귄을 보러 배에 올랐다. 남극 방향으로 한참을 달려 언뜻 펭귄처럼 보이는 가마우지 떼를 지나고, 켜켜이 누워 있는 바다사자 무리를 지나 빨간 등대가 있는 섬에 잠시 멈췄다. 문득, 영화 <해피투게더>에서 아휘가 슬퍼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fin del mundo, 세상의 끝. 그 말을 되뇌다 불현듯 그리움에 사무쳤다. 지금은 살아 있는지 알 길조차 없는 그 사람. 나에게 동물은 자연에 있는 것이 좋다며 넌지시 동물을 가두어 기르는 것을 그만두게 해주었던 인간. 생명은 일대일의 가치를 지닌다고 말해주고, 나를 하나의 생명체로 존중하고, 그래서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충만해지던 그에게 ‘Yo contigo voy al fin del mundo’라고 편지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구별 어딘가에 있겠지?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세상의 끝에서 그만 그가 그리워졌다.

펭귄 섬으로 향하는 뱃전에서 칼바람을 맞으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빠빠빠 빠아아 뿌우우” 하는 장난감 나팔 같은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해변에 있던 펭귄들이 우리를 보고 저마다 다른 높낮이로 말을 하고 있었다. 내 귀에는 “인간들. 또 왔네, 또 왔어”처럼 들렸다. 배에서 보는 코스와 섬에 내려 정해진 길로만 다니는 코스가 있었는데, 배에서 보는 걸로 정했다. 펭귄과 함께 걷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지만 인간의 접근이 과연 그들에게 괜찮을지 망설여졌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멀리서 야생의 펭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너무 좋아서 입이 귀에 걸렸다. 마젤란, 젠투, 황제 펭귄 등 다양한 펭귄들이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펭귄들이 갸웃거리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그들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졌다. 어느덧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펭귄들과 헤어질 시간. 아쉬움을 남겨두고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는 배가 너무 자주 섬에 다가가는 것도 좋은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방식의 투어는 어떻게 운영돼야 인간과 동물과 자연에게 모두 괜찮을 수 있을까? 세상의 끝에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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