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드레드락을 하게 된 이유

마고의 매직 라이프
글과 사진 마고

내가 드레드락을 하게 된 이유

드레드락과의 인연

내가 드레드락(핑 파마 후에 백콤을 넣어서 머리를 푹신하게 한 다음 머리를 땋는 스타일로 흔히 ‘레게머리’로 알려져 있다)을 처음 본 것은 재수시절 홍대에 있는 미술학원에 다닐 때였다. 서울역에 있던 재수학원에서 미술학원으로 가던 버스 안이었다. 어떤 젊은 한국 여자가 손톱의 매니큐어는 반 이상 벗겨지고 총천연색의 생전 본 적이 없는 옷에 머리는 드레드락을 하고 있었다. 나는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를 함께 버스에 탄 친구와 힐끔힐끔 쳐다보며 버스가 홍대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의 외모를 가지고 수군댔다. 더러운 손톱부터 모든 것을 트집 잡으려 치면 끝이 없었다.

   

그 후 대학에 진학하고 1년도 지나지 않아 언니와 함께 ‘우핑(WWOOFING, 하루에 5~6시간의 농장일을 하면 농장주가 숙식을 제공하는 것)’도 하고 영어도 배울 겸 호주에 가게 됐다. 그리고 그렇게 가게 된 호주에서 홍대로 향하던 버스 안의 그녀와 비슷한 헤어스타일을 한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히피’라고 불렀다. 우핑을 하던 집의 주인아주머니는 ‘저런 사람들은 사기를 잘 치니 조심하라’고 했지만 나는 어느 바닷가의 히피 마켓에서 어쩌다가 알게 된 친구들과 어울리며 ‘히피들의 모임’에 가담해 그들과 다양한 축제와 산과 들 등 광대한 야생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1년이 좀 안 되는 시간을 호주에서 보내고 온 나는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떠날 때만 해도 깔끔한 여대생이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머리는 다 엉키고 구멍 난 옷을 입고 있었다. 피난민 같은 모습으로 집에 돌아오니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화장실로 데려가 마치 오랫동안 닦지 않아 때가 낀 변기를 닦듯 박박 목욕을 시키고 엉킨 머리를 참빗으로 빗으며 머리의 이를 모두 잡아 죽였다.

   

세월이 흘러 나는 드레드락을 한 남자와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 셋을 낳고 함께 살고 있다. 남편은 부모님의 이혼 그리고 사춘기 시절의 힘들었던 가정 문제들을 버리고 자신의 길을 가겠다고 결정을 한 후 드레드락을 하기 시작했고 여태까지 기르고 있다. 남편은 힘들었던 시기를 레게음악을 들으며 위안을 얻었고, 주변 친구들과 함께 점점 더 깊숙이 레게문화에 빠져들었다.

당시 나는 남편을 처음 봤을 때 나만의 선입견으로 ‘특이한 드레드락을 했으니 센스가 좋은 멋쟁이일 거야’라고 짐작했는데 알고 보니 남편은 외모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한창 꾸미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이십 대 처녀인 나와는 정반대였다. 생전 얼굴에 크림 한 번 발라본 적이 없고 옷도 사지 않아서 내가 가끔씩 가져다주는 옷만 입었다. 그런데도 부족함이 없었다. 헤어스타일을 멋으로만 생각했던 나와 다르게 남편에게 그것은 인생의 중요한 약속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나와는 다른 면에 끌려 우리는 함께하게 됐고 함께하는 시간만큼 점점 닮아가고 있다.

드레드락을 하고 레게음악을 듣는 남편과의 만남

남편과 한국에 살 때 우리는 남편이 어린 시절부터 동경하던 자메이카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리고 라스타 공동체에서 몇 달의 시간을 보내면서 남편의 문화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는 그의 뿌리인 가톨릭이 자신을 억압했다면, 라스타의 철학은 자신에게 자유와 신념을 가져다줬다고 말했다. 레게음악은 유럽인들에게 인기가 점점 많아져 음악을 넘어 점점 큰 무브먼트를 만들어갔다. 밥 말리를 비롯한 수많은 레게가수들이 드레드락을 하고 있어 드레드락은 라스타의 상징처럼 되기도 했다.

우리에게 지낼 곳을 서슴없이 내어준 라스타 공동체에서는 한두 사람을 빼놓고 아이들까지 모두 드레드락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영혼의 엄마 코린 아주머니가 내게 드레드락을 해줬다. 아주머니는 ‘최초의 인간들은 빗질을 하지 않아 모두 드레드락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두껍고 고불거려 빗질을 하지 않으면 저절로 들러붙는 아프리카인들의 모발은 드레드락을 위한 최적의 모발이라고 한다.

하지만 양털과 비슷한 아주머니의 머리와 동양인 직모인 내 머리는 너무 달라서 오래지 않아 아주머니가 내게 만들어준 드레드락은 금세 다시 풀려버렸다. 나처럼 긴 생머리를 처음 보는 아줌마는 머리가 왜 자꾸 풀리는지 이해하지를 못했다. 그 후 남편이 다시 몇 날 며칠을 꼬아 내게 드레드락을 만들어준 후로 미용실에 가지 않은 지 10년이 넘어간다.

   

레게음악은 몇백 년 동안 세대에 세대가 걸쳐 노예로 희생되고 억압당한 깊은 한이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흥겨운 리듬과 매치시켜 즐겁게 승화시킨 음악이다. 레게음악은 라스타의 메시지다. 남편은 판소리를 통해서 알게 된 ‘한’의 애절함을 레게음악에서도 함께 느낀다고 했다. 유럽인들에 의해 뿌리가 잘렸지만 자메이카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음악, 뿌리를 중요시하는 레게음악은 심지어는 장르 이름도 ‘뿌리 레게(Roots Reggae)’로 통한다. 레게음악은 음악을 넘어 삶으로 확장돼 점점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그들은 삶이라는 단어를 ‘Livity(자연 세계와 신념의 조화를 뜻하는 흑인 회귀주의 용어)’라고 부른다. 그래서 어떤 일본 라스타 레게 뮤지션은 쌀농사를 지어 공연 때 본인이 직접 기른 쌀을 판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이곳에서도 남편을 통해 주변에서 양봉업을 하며 레게음악을 한다거나 농사를 지으면서 레게음악을 하는 사람들을 종종 봐왔다. 그렇게 라스타 공동체에서 지내는 동안 산꼭대기의 깨끗한 자연과 어우러져 건강한 삶을 일궈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만의 스타일과 신념으로 변주한 레게문화

라스타 공동체에서 성경책도 읽었다. 여러 가지 수많은 버전으로 존재하는 성경책들 중 나는 킹제임스 판을 읽었다. 책을 통해 400년 전 아프리카에서 자메이카로 강제 이민된 노예들이 유럽인들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노예들로부터 시작된 움직임이 다시 유럽으로 넘어가 많은 유럽인들에게 영향과 영감을 주고 있다는 해석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마을 사람들은 아침마다 커다란 마당에서 예술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함께 성경책을 읽고 기도를 드렸다. 남편은 매일 아침 함께 기도를 드렸고 나는 사진을 찍었다. 유아 세례를 받은 남편은 자기가 자란 곳에는 아무도 믿지 않아 신이 죽었는데, 이곳에서는 신이 사람들의 마음에 살아 있다고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신의 말씀을 따른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불교에서 말하는 실천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솔직히 21세기 모던한 시대에 현대식 교육을 받고 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는 내가 드레드락을 했다고 해서 블루마운틴의 산꼭대기에서 영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나 인도의 수행자들처럼 강력한 영적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하는 것은 과장일 것이다. 다만 미용실에 가지 않고 머리스타일을 유행에 맞춰 어떻게 바꿔볼까 고민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정말 편하고 경제적이다. 거기에 머리를 감을 때 가끔 비누를 사용하고 거의 물로만 감으니 물을 덜 더럽히지 않는가? 나의 아름다움을 위해 더 이상의 공해를 만들지 않으니 죄책감도 덜고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라이프스타일, 헤어스타일, 남자친구 스타일 등 모든 단어들이 스타일과 만나면 왠지 그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 같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일은 자칫 얄팍하게 여겨진다. 어찌 보면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스타일 안에 가려진 보이지 않고 변하지 않는 무엇일 테니까. 그것에 비하면 바로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빙산의 일각이거나 신기루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수천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드레드락과 관련된 세계 조상들의 종교와 문화에 대해 생각해봤다. 인도의 베딕 경전에 나오는 시바(Shiva)를 따르던 사람들, 아프리카의 마사이족, 사막의 원주민들, 티베트 불교 승려들의 삶에 대하여. 막연하게 그들을 상상해보다가 문득 일제강점기 때 세계화 물결이 시작됐을 무렵 일본군이 상투머리를 자르려고 하자 ‘부모에게 물려받은 머리카락을 자르려면 차라리 내 목을 치라’고 했던 우리 선조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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