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고통의 시간을 지나 희망의 빛을 품다

히로시마 문화 기행 2
글과 사진 장보영

히로시마, 고통의 시간을 지나 희망의 빛을 품다

반나절의 미야지마 유랑을 마치고 서둘러 산단쿄(三段峡)로 향하는 마지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산단쿄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 작고 단아한 료칸. 이튿날 깨어난 새벽 5시에 다다미방의 커튼을 열고 어둠을 거두는 순간 낮은 탄성을 뱉었다. 이토록 깊숙한 산중에서 간밤을 보냈다니. 어제 늦은 시간에 숙소에 여장을 풀었던 터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몰랐는데 밑이 까마득한 폭포가 지척에서 장쾌한 물줄기를 내뿜고 있었다. 잠결에 들었던 빗소리는 그러니까 환청도 꿈도 아니었다.

산단쿄는 히로시마 아키오타정 시바키가와(柴木川)에 흐르는 15km 길이의 협곡으로, 1953년에 국가특별명승지로 지정됐을 만큼 수려한 비경을 자랑한다. 해발 1,346m의 히로시마 최고봉 오소라칸(恐羅漢山) 산행과 함께 산단쿄 계곡 트레킹이 유명하지만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의 길이다. 이불을 개켜놓고 정갈한 조식으로 배를 채운 후 배낭을 메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30여 분 정도 버스를 타고 오소라칸 스노우파크 스키장에 도착했다.

40년이 넘은 스키장이라더니 녹슨 스키리프트며 캠프사이트며, 과연 오래되고 낡은 것으로 가득했다. 초여름의 스키장은 텅 비어 있었다. 초록의 잡풀만이 무성한 스키슬로프를 지도 한 장 들고 거꾸로 거슬러 올라갔다. 오소라칸으로 오르는 가장 짧고 빠른 길. 스키슬로프를 벗어나자 너른 임도가 펼쳐지며 산이 열렸다. 피톤치드 가득한 삼나무들이 수령을 헤아릴 수 없는 깊고 아늑한 그늘을 만들어 이마의 땀을 식혀주었다.

시원한 산들바람과 침묵 사이를 분주하게 가로질러 이윽고 정상에 올랐다. 월요일 오전의 산정에는 역시 아무도 없었다. 저 멀리 히지리코(聖湖)의 윤슬이 하얗게 빛날 뿐. 그거면 충분했다. 어쩌면 이 순간을 위해 나는 히로시마에 온 걸지도 모른다. 오후의 일정을 위해 서둘러 하산했다. ‘다시 오지 않겠지. 많은 순간들이 그랬던 것처럼.’

스키장으로 되돌아왔을 때 어디선가 희미하게 북소리가 들렸다. 홀린 듯 자연스레 그쪽을 향해 걸었다. 기척이 나는 곳은 지금은 영업을 하지 않는 작은 레스토랑이었다. 그리고 열린 문으로 들어간 그곳에서 나는 귀신이라도 본 듯 소스라쳤다. 현장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전통 가면극이 한창이었는데, 상당히 화려하면서도 어딘가 근엄한 분위기가 신비로운 기운을 풍기고 있었던 까닭이다. 마을 주민들로 보이는 몇몇 어르신들이 좌중을 메우고 있어 나도 조심스레 그 속에 섞여 앉았다.

그런데 누군가가 뒤에서 톡톡 나의 어깨를 두드린다. “너 아까 산에 있지 않았니?”, “응, 어떻게 알았어?”, “아까 스키슬로프 올라갈 때 봤어. 나도 오소라칸에 올라가는 길이었거든, 정상에 가면 만날 수 있겠다 싶었는데 금방 갔지만 없더라구”, “아, 금방 하산했거든!” 평일 오전의 산에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누군가는 어딘가에 있었고 나처럼 자신만의 시간을 만들고 있었다.

‘사스케(Sashuke)’라는 이름의 청년에게 눈앞에서 재생되는 공연에 대한 정보를 조금 얻을 수 있었다. 사스케는 이 공연을 히로시마 지방의 전통 악극 ‘카구라(神樂)’라고 소개했다. 지금 우리가 보는 무대는 딸을 잡아간 뱀을 찾으러 간 노부부의 이야기라고. 덧붙여 히로시마 지방에는 현재 300개가 넘는 카구라 밴드가 있으며, 공연도 왕성하게 하고 있다고 한다.

마침 이 자리는 마을의 작은 축제 현장이었다. 운이 좋았다. 인생에 대한 선대들의 희로애락이 담긴 전통 공연이 오늘까지도 잘 이어져 내려오는 모습과 함께, 사장되지 않고 현대인들의 일상 구석구석에서 생생하게 호흡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삶의 풍요로움을 느꼈다. 세상에는 시시각각 변하는 것들이 있는 반면 시간이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구분하는 현명함 아닐까.

오후 4시. 히로시마로 나를 초대한 친구 에이코와 조우해 석양이 깔리기 시작한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총총히 가로질렀다. 히로시마에는 두 개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있다. 하나는 히로시마에 도착한 첫날에 다녀온 미야지마의 이츠쿠시마 신사, 나머지 하나는 바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히로시마 원폭돔이다. 원폭돔은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듯, 그로부터 73년이 지난 오늘까지 단 한 순간도 그날을 잊은 적 없다는 듯 굳은 모습으로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이 처연해 보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의연해 보이기도 했다. 세상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에서 나의 마음은 먹먹해졌다.

우리에게 평화기념관을 둘러볼 수 있는 시간은 기념관이 마감하기까지 2시간 정도 주어졌다. 기념관은 모두 3층이었는데 전관을 고루 활용해 피폭 당시의 참상과 피폭 전후의 히로시마 변천사를 보여주는 사진들과 자료들, 원자폭탄 피해자들의 유품들을 전시해 원폭의 잔인함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이기에, 그것을 바라보는 일은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괴로웠다.

어쩌면 역사라는 것은 타자의 아픔들로 점철된 시간이 아닐까. 천재(天災)든 인재든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곳곳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그 속에서 누군가는 죽고, 또 누군가는 살아간다. 하지만 그만큼 또 놀라운 것이 회복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극악의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힘, 더 나아지려는 힘, 그리고 살고 싶다는 힘이 자연에게, 인간에게 있다. 그러니까 역사라는 것은 사람들이 어떤 고통을 극복한 뒤 가까스로 만난 환한 빛들로 점철된 시간이 아닐까.

   

1964년 10월 도쿄 올림픽이 열렸다. 원자폭탄의 섬광이 히로시마의 하늘에 번뜩인 바로 그날 그곳에서 태어난 청년이 최종 성화 주자로 선정돼 올림픽의 시작을 알리는 성화 점화를 했다. 히로시마는 원폭의 비극이라는 상흔을 껴안고 더 나은 현재를 만들어가며 미래를 그리고 있다. 다시는 이러한 재앙이 이 세상에서 벌어지지 않기를, 핵무기 없는 평화의 시대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문득 2011년 3월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떠올랐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 후쿠시마 원전 사건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깨달음으로부터 우리는 또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

“원폭 후유증으로 백혈병을 앓았던 한 소녀가 종이학을 1,000마리 접으면 완쾌된다는 말을 듣고 약 종이를 모아 학을 964마리까지 접다가 병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어”라고 에이코가 말했다. 기념관 지하의 유리관 안에는 종이학 두 마리가 곱게 놓여 있었다. 2년 전 이맘때 평화기념관을 방문한 미국 오바마 전 대통령이 접어 기증한 거라고 한다. “종이학이라니, 정말 오랜만이네.” 간절한 소원을 이루어준다고 믿어온 종이학, 내가 바라는 곳으로 희망을 가져다준다고 믿어온 종이학. “오늘 자기 전에 학을 접어볼까? 그리고 소원을 빌자”, “그래, 그렇게 하자. 그런데 내 소원이 뭐더라, 학은 또 어떻게 접었지?”

 

히로시마에서 발견한 특별한 문화 공간 #2

히로시마 최초의, 유일의 유기농 라이프 스토어
<Croissant-marche>

들어오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나네요! 간단히 소개 부탁드려요.

히로시마 유일의 유기농 라이프 스토어 <Croissant-marche>입니다. 저는 이곳을 운영하고 있는 유카(Yuka)라고 해요. 평소에도 음식에 관심이 많고 요리하는 걸 좋아해서 4년 전 <Croissant-marche>를 오픈했습니다.

 

이곳을 운영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히로시마에 유기농 식자재와 식료품을 판매하는 가게가 없었거든요. 유기농 식자재와 식료품 판매와 함께 ‘건강한 먹거리’를 주제로 몸에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을 만들어보면 좋을 것 같아서 이곳을 열게 됐어요.

 

취급하는 제품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주세요.

유기농 채소를 비롯한 비건 제품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동물성 식재료를 사용하지 않은 초콜릿, 콩고기, 통조림, 밀가루, 견과류, 씨앗 그리고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빵이나 쿠키 등을 맛보실 수 있어요.

상점 내 식당에서는 어떤 음식을 먹을 수 있나요?

‘마크로비오틱 도시락(마크로비오틱이란 제철음식을 뿌리부터 껍질까지 통째로 섭취하는 식습관)’을 만들어드려요. 인공 첨가물을 사용하지 않아 건강한 음식인데요. 메뉴는 격주로 바뀌어요. 오전 11시 30분부터 오후 2시 30분 사이에 가게에 방문하시면 드실 수 있구요. 히로시마 시내 슈퍼마켓에서도 제가 만든 마크로비오틱 도시락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운영하면서 뿌듯한 순간이 있다면 언제인가요?

퇴근길에 이곳에 들러 행복한 얼굴로 저녁 식재료를 고르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요. 마크로비오틱 도시락을 맛있게 먹는 사람들을 보는 일도 기쁘구요. 더 많은 사람들이 건강한 먹거리에 관심을 가지고 생활을 좋은 쪽으로 바꿔나가길 응원하고 있습니다.

       

힘든 순간도 있을 것 같아요.

소규모로 운영하다 보니 재정적인 부분에 있어 어려움이 없다고는 할 수 없어요. 대형마켓에서 판매하는 제품들과 비교해 가격이 비싸다며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도 있구요. 하지만 신선하고 건강한 음식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저희 가게의 제품을 무척 애용하고 있어요.

 

이곳이 히로시마에서 오래도록 자리를 지켜줬으면 좋겠습니다. 히로시마로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한국인 여행자들에게 한마디!

한국에서 <해피투데이>를 보고 찾아오셨다고 하면 더없이 반가울 것 같네요. 다양한 유기농 식자재와 식료품, 손수 만든 마크로비오틱 도시락이 궁금하시다면 히로시마 유일의 유기농 라이프 스토어 <Croissant-marche>에 꼭 들러보세요. 히로시마에서의 추억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가실 수 있을 거예요.

 

<Croissant-marche>
대표:
Yuka

주소: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나카구 사카이마치 1-3-4-101
(広島県広島市中区堺町1-3-4-101)
운영시간: 오전 10시~오후 7시(일요일 휴무)
문의: +81-(0)82-234-8133 / croissant-marche.blogspot.jp
SNS: instagram.com/croissant_marche

ⓒ(주)혜인식품-네네치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