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밴쿠버 아일랜드 여행기

캐나다 생활기 7
글과 사진 긴수염

좌충우돌 밴쿠버 아일랜드 여행기

연말은 남미에서 보내려고 미국을 경유하는 저렴한 항공권을 서둘러 예약했다. 그런데 ESTA 비자 발급을 받으려면 전자여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캘거리 순회영사를 놓치는 바람에 밴쿠버에 있는 영사관에 가야 한다. 일터에 사정을 말하자 흔쾌히 다녀오란다. 멀리 가는 김에 여행도 하고 싶어서 닷새의 휴가를 얻었다. 지도를 보다가 캐나다의 서쪽 끝에 있는 밴쿠버 아일랜드가 궁금해졌고, 아무 정보 없이 동선을 짜기 시작했다.

캘거리에서 밴쿠버까지 버스로 약 16시간 이동해 영사관에 들러 전자여권을 신청한 뒤, 여권이 처리되는 동안 밴쿠버 아일랜드에 다녀올 심산이었다. 제주도에서 알게 된 코비라는 친구에게 계획을 말하자 시애틀에 있는 자기 가족들을 만나라고 해서 전자여권을 수령한 후 국경을 넘기로 했다. 그런데 출발 전날에서야 여권을 꺼내보고는 실소가 나왔다. 캐나다에 들어올 때 이미 전자여권이었던 것이다. 평소 허당 소리 자주 들었는데 이번엔 역대급이었다. 한바탕 ‘껄껄껄’ 웃어젖혔다. 어차피 가기로 한 여행이니 떠나버리자!

토론토에서 캘거리까지 버스로 2박 3일간 달려봤기에 16시간쯤은 별거 아니라 생각했다. 커다란 배낭 하나 둘러메고 호기롭게 버스에 올랐다. 그러나 앨버타에서 브리티시컬럼비아로 넘어가는 길은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구불구불한 길을 아슬아슬하게 달리는 버스 안에서 아름다운 풍경과 기사의 곡예 운전을 동시에 감상하게 되었다. 교통사고 현장을 목격하고는 다소 긴장이 되었지만, 기사를 믿는 수밖에. 실컷 별을 보다 잠들었다.

이른 새벽, 밴쿠버에 무사히 도착했다. 쉴 새 없이 지하철을 타고 페리 터미널로 이동. 배가 출발하기 전까지 동네를 배회하는 하얀 늑대 같은 개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밴쿠버 아일랜드의 나나이모로 향하는 배에 탑승한 뒤, 따뜻한 코코아 한 잔으로 주린 배를 채웠다. 주체할 수 없이 잠이 쏟아졌으나 혹시 고래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았지만 보지 못했다. 어딘가 있겠지.

나나이모에 도착. 도보로 30분 거리에 있는 렌터카 회사로 걸어가 작은 차를 빌렸다. 해가 지기 전에 토피노에 닿고 싶어 달리고 또 달렸다. 섬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길은 험해지고 원시림의 풍경이 펼쳐졌다. 해는 점점 기울고 내 맘은 점점 초조해지고. 다행히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 아무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자 주인장이 롱비치에 꼭 가보라고 해서 짐을 풀지도 않고 다시 왔던 길을 돌아 롱비치로 갔다. 그곳에서 석양을 만끽했다. 태양이 바다에 녹아드는 장면은 언제 봐도 경이롭다. 문득 외연도에서 일몰을 보던 순간이 떠올라 향수에 잠겼다. 보고 싶은 얼굴이 태양과 오버랩되어 바다 뒤로 사라져간다.

마을 전체를 둘러보는 데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작고 한적한 바닷가 마을은 모든 것이 느린 느낌. 사람들은 느릿느릿 자동차는 엉금엉금. 쉴 새 없이 이동하느라 전쟁 통이었던 내 마음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다. 며칠 더 머물고 싶지만, 일정이 있으니 돌아가야 한다. 가게에서 음식을 사서 데워 먹고 맥주 한 캔을 마신 후 침대에 누우니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달리기만 하는 여행은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 하지만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고 만나고 싶은 생명체들이 수두룩하고 나의 호기심은 끝이 없는 걸 어찌하리오. 지도의 끝이나 미지의 장소에 끌리는 나의 성향은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다음 날 벌떡 일어나 출발! 이른 아침의 롱비치는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어딘가에서 떠밀려와 마치 동물의 뼈처럼 누워 있는 하얀 고목들. 그 위에 하얀 얼음 조각들이 꽃처럼 피어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운데 갑자기 쓸쓸해졌다. 마치 다른 행성에 나 혼자 떨어진 것 같은 느낌. 하지만 어디선가 파랑새가 나타나 고독을 깨주었다. 원시림에서 이름 모를 새들이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지저귀는 것 같았다. 숲을 거닐다 얼음 조각을 입은 식물들의 모습이 아름다워 연신 카메라에 담았다. 햇빛을 받으면 사라질 순간들. 누군가 바라보는 것 같아 돌아보니 할로윈의 잔해들이 웃고 있다. 누가 호박을 옮겼을까.

숲에서 얼어붙은 몸을 녹이고자 퀄리컴 비치에서 광합성을 했다. 저 멀리 바다에서 ‘껑껑’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개는 찾아볼 수가 없는데, 큰 개와 함께 지나가던 주민이 두리번거리는 나에게 말했다. “저건 바다사자야.” 내가 뛸 듯이 기뻐하자 그는 바다사자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어주었다. 자세히 보니 바다사자의 머리와 손이 보인다. 몇 마리가 뒤엉켜 트럼펫처럼 ‘껑껑’대며 난리 부르스다. 집 앞에 바다사자가 산다니. 고래 철에는 고래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단다. 미소 짓는 그가 한없이 부러웠다.

렌터카는 겨우 제시간에 반납했다. 직원에게 터미널에 태워줄 수 있는지 물어보자 흔쾌히 그렇게 해주었다. 그런데 터미널이 썰렁하다. 뭔가 이상했지만 직원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내렸다. 이내 정류장이 바뀌었다는 안내문이 보였다. 아뿔싸! 회사에 전화해 사정을 말하자 직원이 나를 다시 태우러 왔다. 열심히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버스를 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숙박시설이 거의 없는 이곳에서 노숙을 해야 하는 신세. 친구의 가족들과 시애틀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 또한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

   

직원은 능숙한 솜씨로 운전하여 정류장에 나를 내려주었다. “정말 너무너무 고마워!” 그는 나에게 행운을 빌어주었다. 버스 시간은 지났지만, 사람들이 몇 명 서 있기에 작은 희망을 걸고 기다렸다. 5분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 반쯤 포기하고 밤샐 곳을 찾아보려는데 버스가 등장했다.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며 배낭을 짐칸에 던져 넣고 버스에 탑승했다. 신나게 남쪽으로 달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창인 빅토리아에 도착했다. 야생에서 도시로 순간 이동한 기분. 번쩍거리는 궁전이 신기루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인적 드문 화려한 거리를 서성이다 호스텔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내일은 배를 타고 국경을 넘는다.

이튿날, 페리를 타고 포트 엔젤레스로 향했다. 이 넓은 바다의 어디쯤이 국경일까. 동물들은 국경을 비교적 맘대로 넘나들겠구나. 물론 자기 영역을 지키느라 싸우기도 하겠지만. 인간들은 왜 이렇게 선을 긋고 힘들게 사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 국경 어디쯤에서 국경 없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그러는 사이 항구에 도착. 또다시 버스를 타고 배를 타고 겨우 시애틀에 닿았다. 지쳐버린 나를 친구의 가족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들의 집에 가서 간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포근한 방에서 푹 잠들었다.

다음 날, 온종일 시애틀 명소를 둘러보았다. 시장 구경이 재밌었다. 에너지 넘치는 친구의 가족과 함께 다녔더니 나도 덩달아 충전되었다. 그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헤어졌다. 배로 넘었던 국경을 이번에는 버스로 넘는다. 그런데 밤새 달리던 버스가 멈췄다. 바퀴가 터진 것이다. 전파가 잡히지 않으니 지나가는 차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하지만 새벽 3시에 누가 이 산골짜기를 지난단 말인가.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잠이 들었다. 나는 주변을 탐색하다가 별을 보다가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잠들어버렸다. 꿈에서 버스가 들썩들썩 놀이기구 같았다. 잠에서 깨자 버스는 아침을 달리고 있었다.

    

   

몇 시간 늦었지만, 무사히 캘거리에 도착했다. 일터에 출근해서 보스에게 말했다. 사실은 전자여권인 것을 떠나기 전날 발견했다고, 어이가 없었지만, 버스표를 이미 끊은 상태라 다녀왔다고. 시애틀에서 데려온 선물을 내밀자 그가 씩 웃는다. “괜찮아, 수염. 좋은 여행했다니 나도 기뻐.”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좌충우돌 여행은 끝났지만, 밴쿠버 아일랜드와 국경 어느메에서 느꼈던 여러 가지 감정들은 이후로도 꽤 오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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