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남기고 간 향기

밀양댁 엄마 손 밥상
글과 사진 이미라

 

여름이 남기고 간 향기
바질페스토

 

지난여름은 태양과의 한판 전쟁이었다. 아침에 깜박 늦잠이라도 잘 요량이면 태양은 더 신나게 뜨거움을 발산했다. 왠지 축 처지는 듯 기운이 없어서 잠깐 꾀를 부리기라도 하면 게으름에 벌이라도 주는 듯 유독 나의 텃밭에 쨍쨍 볕을 내리쬐곤 했다. 뒤늦게야 부랴부랴 텃밭으로 나가보면 때 맞춰 물을 주지 못한 텃밭 채소들은 나보다 더 기운 없이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평소의 세 배가 넘는 수도요금을 납부하면서까지 물주기에 정성을 기울였으나 수확은 풍요롭지 않았다. 하지만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었던 자리에 어김없이 싹이 돋고 작은 열매가 맺히는 모습이 초보 농부에게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더 놀랍고 재미있었던 것은 호박을 심은 자리에 수박이 열렸을 때였다. 사실 이파리가 좀 다르다 싶었지만 그저 신품종 호박이려니 했는데 자랄수록 영판 수박의 생김새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더 이상 커지지도 않고 해서 반을 잘라 보았더니 속도 차지 않고 육질이 퍼석하여 감히 먹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이유도 모른 채 나의 첫 수박 수확은 눈요기로 끝이 났다.

 

수박뿐만이 아니었다. 호박을 심은 자리에 또 다른 열매가 열렸는데 호박이라고 하기엔 껍질이 너무 단단했다. 성장을 거듭하면서 ‘박’이구나 싶었는데 표면에 구름무늬도 생기고 길이도 길쭉한 것이 내가 아는 박의 생김새가 아니었다. 혹시나 싶어서 나물로 만들어보았더니 ‘박’이 맞았다. 육질이 연하고 부드러운 것이 별미였다. 조갯살을 다져서 참기름에 달달 볶다가 채 썬 박을 넣어 볶는 박나물은 국물을 자작하게 만들어서 뽀얀 국물과 함께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제 맛이다. 간장으로 간을 하면 뽀얀 박이 빛깔을 잃게 되므로 반드시 소금으로 간을 해야 한다. 30cm가 넘는 크기의 박을 볶았더니 그 양도 푸짐했다. 어머니께 좀 나누어 드리려고 서둘러 가는 길에 시장 입구에서 그만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내 것과 똑같은 생김새의 박들이 지천에 널렸다. 나의 구름이 그려진 박이 특별한 것이 아니고 흔하디흔한 ‘박’이었다니, 시골에서 자란 내가 모르는 채소가 있다니, 은근 자존심이 상했다. 길가에 이 정도로 쌓여 있었으면 하루에도 몇 번을 지나치는 길이기에 분명 마주쳤을 텐데 오늘 처음 눈길이 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인다’, ‘경험이 중요하다’ 같은 통속적인 말들이 뇌리를 스치면서 ‘관심’이라는 두 글자가 얼마나 큰 존재인가를 실감했다.

 

 

지난 봄날 모종 팔던 이모의 실수로 기대하지 않던 수박과 박을 만나는 기쁨도 잠시, 여름 날 텃밭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예쁘게 자라던 가지도 한낱의 뙤약볕에 항복하며 피부가 쪼글쪼글해지기 일쑤였고, 토마토도 커가면서 모조리 터지기 시작했다. 알알이 맺힌 귀한 토마토들이 터졌다고 버릴 수도 없고 해서 반으로 잘라서 채반에 말렸다. 가살스럽기만 하던 태양이 썬드라이드 토마토를 만듦에 있어서는 그리 고마울 수가 없었다. 반신반의하며 도전한 자연건조 토마토는 단 3일 만에 만족스럽게 말랐다. 말린 토마토는 유리병에 담아 살짝 소금 간을 하고 올리브유와 바질을 넣어 저장했다. 양이 무척 적어서 아쉬웠지만 두어 번 파스타를 만들 수 있을 듯하여 뿌듯했다.

 

욕심껏 뿌려둔 허브 씨앗들 중에서 ‘딜’은 폭풍 성장을 하여 여름 샐러드를 만들어 먹을 때나 연어스테이크를 할 때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주었다. 그다음으로 ‘보리지’가 씩씩하게 자라주었는데, 잔털로 덮여 있는 거친 가지와 잎과는 달리 별 모양의 여린 꽃은 보라색 빛깔이 참 곱고 예뻤다. 습진이나 피부병에 효과가 있는 허브라고 해서 아토피가 있는 둘째 아이가 샐러드를 먹을 때마다 대여섯 송이씩 따다가 올려주는데 보랏빛의 작은 꽃들이 샐러드를 얼마나 고급스럽게 만들어주는지 모른다. 특히 내가 정성을 기울인 허브는 바질이다.

 

바질의 경우 자랄 때 윗가지를 톡톡 따주면 가지가 옆으로 더 잘 뻗어나가서 한 그루가 풍성하게 잘 자랐다. 땅이 척박하고 볕이 따가워도 잘 견뎌주다가 말복이 지난 후부터 쑥쑥 자라더니 샐러드나 토핑으로 먹고도 넘칠 만큼의 이파리들이 달렸다. 이 소중한 바질을 오래오래 먹기 위해서는 바질페스토를 만들어두는 것이 가장 좋다. 한꺼번에 많은 양을 만들어 작은 지퍼백에 소분 후 냉동보관하면 된다.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꺼내 쓸 수도 있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방법이다.

 

 

시중에 파는 바질페스토는 가격이 사악할 뿐 아니라 짠맛이 강하여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바질과 올리브유, 잣(잣이 없을 경우 아몬드를 이용해도 괜찮음), 마늘, 소금과 후추, 파마산 치즈(생략해도 무방함)로 간단하게 바질페스토를 만들 수 있다. 금방 따 온 바질잎은 깨끗하게 씻어 물기를 뺀다. 혹 씻은 후 냉장고에 넣게 되면 잎이 검게 변하므로 반드시 씻어서 실온에서 물기를 빼야 한다. 블랜더에 잣과 마늘, 올리브유를 넣고 먼저 갈다가 바질을 넣고 또 간다. 한꺼번에 많은 양의 바질을 넣기보다는 몇 번 나누어 넣으면서, 올리브유를 첨가해가면서 가볍게 갈아준다. 마지막에 소금과 후추, 파마산 치즈를 넣고 섞듯이 갈아주면 끝! 소독한 유리병에 담고 윗부분에 올리브유를 넉넉히 뿌려 공기와 접촉되지 않게 한 후 냉장보관하면 된다.

 

바질페스토를 만든 기념으로 친구 이나영을 초대했다. 아들의 친구 준서의 엄마로 시작된 인연이 이제는 아들보다 엄마들끼리 더 가까운 친구 이나영이 됐다. 생각해보니 나영이가 파스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직 단 한 번도 파스타를 만들어준 기억이 없다. 바질페스토를 듬뿍 넣고 썬드라이드 토마토로 달콤함을 더한 심플하기 그지없는 파스타와 보리지를 토핑으로 올린 텃밭채소 샐러드를 준비했다. 나영이가 들고 온 바게트 빵에 바질페스토를 과하다 싶을 만큼 듬뿍 올려 먹으니 여름의 향기가 입안 가득 퍼지는 듯했다. 대충 차린 특별할 것 없는 상차림에 호들갑을 떨어가며 맛있게 먹어주는 친구를 보니 뜨거운 여름날 흘린 땀이 뿌듯한 보람으로 다가왔다.

 

바질페스토를 만들어놓으면 피자를 만들기도 쉽다. 또띠아 한 장에 바질페스토를 잘 펴 바른 후 모짜렐라 치즈를 뿌리고 200도 오븐에 5분 정도 구우면 피자가 완성된다. 견과류나 건과일을 토핑으로 올리거나 꿀에 찍어 먹으면 색다른 맛을 즐길 수 있다. 또띠아가 없을 때는 담백한 빵에 바질페스토를 발라 먹는데, 그냥 빵에 잼을 바르듯 듬뿍 바르기만 해도 그 맛이 특별하다. 삶은 파스타 면에 바질페스토 한 숟가락을 넣고 섞은 후 치즈만 솔솔 뿌려주어도 완벽한 파스타가 되니 바질페스토는 감히 만능 소스라고 할 수 있겠다.

 

 

농부가 가을걷이를 하듯 조금씩 저장할 수 있는 것들을 챙기고 있다. 작은 가지들을 잘린 채로 말려 돼지고기 요리에 넣으면 잡냄새가 사라지고 고급스러운 향이 난다. 뒤늦게 발아하기 시작해 잡초로 오해받던 오레가노도 잎을 따서 말려 담아둔다. 토마토소스를 만들 때 빠질 수 없는 오레가노는 그 향이 굉장히 진해서 양이 많지 않지만 겨우내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조선박하와 민트는 차로 만들었다. 잎을 따다가 큰 냄비에 덖어두면 감기가 오려다가 도망가는 훌륭한 감기예방 허브차로 말이다.

 

텃밭을 가꾸면서 욕심이 과해서도 안 되고, 게으름이 넘쳐서도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수확에 대한 욕심으로 씨를 너무 많이 뿌리는 바람에 씨앗들이 발아해 성장할 자리가 부족했다. 어렵게 싹을 틔운 녀석들을 과감하게 솎아내야 하는데 그것 또한 아까워서 망설였다. 비워야 채워지는 진리를 알면서도 욕심이 나의 눈을 가렸던 것 같다. 나의 첫 텃밭 농사는 몸의 고달픔보다 마음속으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는 행위였기에 무엇보다 값진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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