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 일으킨 잡념을 잠식시키는 맛

김하늘의 맛동산
글과 사진 김하늘

불안이 일으킨 잡념을 잠식시키는 맛

합정동 <페페로니(Peperoni)>

분주하다. 꺼지지 않는다. 머릿속에 철야노동자들로 가득 찬 공장이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빈 벽을 낙서로 어지르고 책 속 활자들을 뒤섞는다. 자동차의 엔진음이 바람을 부수고, 날아드는 부연 먼지가 시선을 흐린다. 머리 위로 쓰러질 듯한 고층빌딩은 수백 개의 눈을 흘기며 벼랑 끝으로 나를 몰아세운다.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오래된 일이다. 나는 끊임없이 불안을 사육하고 그것에 물어 뜯겨 피를 흘린다. 눈을 뜬 채로 머리채를 잡히고 숨통이 죄고 발목이 잘려나가는 악몽을 꾼다. 눈을 감아도 장면은 계속 되고 귀를 막아도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린다. 불안은 욕망의 하녀라고 했던가. 알랭 드 보통의 말대로 우리의 삶은 불안을 떨쳐내고, 새로운 불안을 맞아들이고, 또 다시 그것을 떨쳐내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후련하게 비우다가도, 다시 채우고 싶고, 다다르고 싶다. 비탈을 오른다. 보이지 않는 저 너머에 안부 인사를 전한다. 그렇게 고여 있던 술렁임을 저 멀리 흩뿌려 속을 게운다. 목이 마르다.

지하수를 끌어 마시듯, 지금 내겐 맑고 청렬한 와인 한 잔이 필요하다. 높다란 주상 복합 아파트 밑단에 위치한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 ‘페페로니(Peperoni)’. 비장탄을 이용해 구운 한우 채끝과 등갈비, 이베리코 돼지 목살, 양갈비, 닭고기, 문어 등 다양한 숯불 요리로 기운을 북돋고 와인 한 잔으로 목을 축일 수 있다.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선다. 한 겹의 천막이 걸음을 멈춰 세운다. 커튼을 가르고 한 발 내딛으면 무대처럼 디귿자의 바가 펼쳐지고, 양쪽 벽엔 귀부인의 장갑처럼 얌전하고 우아한 조명이 공간에 아늑함을 더한다. 바 안은 주방, 밖은 식사 공간이다. 주방 안쪽 유리벽 너머로 여자 셰프가 그릴 위에 한창 무엇인가 굽고 있지만 연기나 냄새가 바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다. 물 한 모금으로 갈증을 가뿐히 해소하고 남자 셰프에게 주문을 한다. 부부가 운영한다. 아내 셰프는 주로 음식을 하고, 남편 셰프는 아내가 만든 음식에 장식과 마무리를 하거나 음식이나 와인을 추천한다. 바쁠 땐 서로 안과 밖을 오가며 호흡을 맞춘다.

“날씨도 덥고 해서 맛있는 내추럴 와인 마시고 싶어요.” 기분은 감추고 괜한 날씨를 핑계 삼는다. 내추럴 와인은 그야말로 재배나 양조과정에 화학 첨가물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포도, 포도, 포도 그 자체다. 유행이라지만 유행이라 여기기에 새삼스럽다. 자연이 맺은 결실을 인간이 어떤 의지와 철학을 가지고 다룰 것인가는 그야말로 취사선택 아니겠는가.

셰프는 그새 셀러에서 화이트 와인 한 병을 들고 서 있다. 늘 그렇듯 유창하고 친절하게 와인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Zellberg. 독일어로 ‘수도승이 있는 산’이란 뜻이다. 프랑스 알자스 지방의 일류 자연주의 와이너리로 꼽히는 도멘 줄리앙 마이어에서, 패트릭 마이어라는 양조자가 30년간 포도밭에서 수도승처럼 묵묵히 수행하듯 많은 애정과 긴 시간을 할애해서 와인을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이름 붙여졌다. 두 가지의 품종, 실바너와 리슬링이 블렌딩된 Zellberg 2016년산 와인이 테이블 위에 놓인다.

와인병이 열리자마자 코르크 마개가 아닌 작고 투명한 유리 뚜껑이 작은 접시 위에 놓인다. 마시기도 전에 영롱한 맛이 투명한 마개에 비치는 것 같다. 그는 잔을 따르며 꿀맛이 느껴질 거라고 했다. 그의 설명은 와인에 대한 불편한 찬사가 없고 와인의 가치를 편하게 옹호한다. 놓치고 싶지 않은 즐거움에 설렌다. 덜컥 불안에 휩싸이거나 예기치 않은 기쁜 일에 발을 구르는 날이면 이곳에 온다. 무엇보다 특별한 매력을 보유한 다양한 내추럴 와인을 가깝게 즐길 수 있는 곳이라 더욱 그렇다. 와인뿐 아니라 위스키, 코냑, 소주, 사케, 맥주 등 종류가 다양하다.

페페로니(Peperoni). 피자에 덕지덕지 오르는 이탈리안 소시지 페페로니(Pepperoni)가 아니다. 이탈리아어로 ‘파프리카’를 뜻한다. 파프리카의 노랑, 빨강, 초록 등 식욕을 자극하는 색이 좋아 작명했다. 이 이름을 그대로 닮은 문어 요리가 있다. 타원의 접시에 잘 삶은 문어를 얇게 저며 깔고 방울토마토와 오이, 딜, 레몬 두 조각을 얹은 후 올리브 오일을 뿌린다.

여름날의 수채화처럼 청량함이 영근 접시를 받아 감탄한다. 탄력 있는 문어의 감칠맛과 함께 여름철 열매들의 새콤달콤함과 향긋함이 입안 이리저리 터진다. 신선한 올리브 오일이 이를 감싸고 딜의 존재감 넘치는 향이 절정을 이룬다. 입맛과 감각을 깨운다.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불안은 잊히기 시작한다. 그다음 이어지는 버터 바지락 술찜은 불과 맞닿은 바다의 맛이 난다. 베이징 가지 구이는 화려하나 간결하고 확실하다. 양갈비는 뼈만 남기고 악착같이 다 먹어 치운다. 네 접시를 싹싹 비우고 디저트로 체리 한두 알을 얻어 남은 와인과 함께 상큼하게 식사를 마무리한다. 맛있는 음식에 잘 맞는 술을 한 모금 삼키면 이상한 집념이 생긴다. 그 집념은 불안이 일으킨 잡념을 잠식시킨다. 어느새 자리가 꽉 찼다. 머리가 텅 비었다.

불안은 멀리서 보면 익숙하지만 직면하면 번번이 낯설다. 최고조에 달했을 땐 몸의 중심축이 흔들리고 일상이 붕괴되기도 한다. 나는 안다. 불안은 쉽사리 해소되지 않을 것이며 존재는 평안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불안은 욕망으로, 욕망은 불안으로, 혹은 불안은 또 다른 불안으로, 욕망은 또 다른 욕망으로 대체되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잊히는 것일까. 저 멀리 흩뿌려진 욕망을 요리해 접시 위에 담아 씹어 삼킨다. 저 너머의 자연과 누군가의 철학이 빚은 한 잔 술에 웃음이 난다. 배가 부르다.

 

합정동 <페페로니(Peperoni)>

주소 서울 마포구 월드컵로314

영업시간 평일 오후 6~자정, 주말 정오 12~자정

(월요일 휴무)

ⓒ(주)혜인식품-네네치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