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바다

무풍常회 일기

글과 사진 이후

 

겨울 바다

얼마 전 동네 엄마들과 이야기하다가 회가 먹고 싶다라고 하니 나도, 나도라고 이구동성이었다. 하긴, 겨우내 마을회관에서 하루 두 끼 밥을 지어 드시는 동네 어르신들도 한 번씩 대처에서 횟감을 사 와 먹고 가라 기별을 하시곤 했었다. 산골 사는 사람 마음은 다 이런 건지. 나는 거기서 한술 더 떠 겨울이면 괜스레 바다에 가고 싶어진다. 참다 참다 늦은 오후에 출발하여 겨우 도착한 밤바다를 잠깐 보고 시린 바람 속에 차가운 회 한 점, 차가운 소주 한 잔. 그게 좋아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겨울 바다를 보고 오면 어쩐지 착해진 기분이 들었다. 끊임없이 철썩이고 찰랑이는 물소리와 물거품 앞에서 내 돌멩이 같은 마음이 둥글둥글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파도에 모래 글씨가 점점 지워지듯, 파도에 조개껍질이 차차 둥글어지듯, 파도의 타박은 아프지 않았다.

 

동쪽 바다에서의 젊은 날

어쩌다 겨울 바다의 낭만을 품게 되었을까. 최초의 바다는 아마도 친척들과 같이 놀러간 해수욕장이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을 통틀어 딱 한 번이었다. 어느 바다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 영월에 살고 있어서 여름엔 늘 청령포였고, 해수욕장에 갔던 해를 빼곤 매번 사촌들이 찾아와 왁자하게 놀았다. 열세 살이 될 때까지 청령포에서 발가락으로 다슬기도 잡고, 모래성도 만들고, 배를 타고 소나무밭으로 가족 소풍을 가기도 했다.

어느 해엔 익사할 뻔한 적도 있었지만 나에겐 모래밭이 있는 이 아담한 강에서의 추억이 너무 많아 바다에 마음 뺏길 일이 없었다. 더욱이 언젠가 해수욕 인파로 빼곡하게 들어찬 걸 보고는 그만 질렸다고 할까. 바다는 너무 크고, 잔잔히 흐르지도 않고, 감싸주는 정취도 없었다. 춥고, 시끄럽고, 개방되어 있고, 밑도 끝도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참 바다를 좋아하더라. 일부러 바다를 보러가기도 하더라.

줄 서서 들어가야 하는 식당에는 절대 가지 않는 나로선 여름엔 질색이지만 철 지난 바닷가라면 괜찮았다. 몇 번 다니다 보니 결국 좋아졌다. 대학교 문학동아리 후배들과 갔던 겨울 정동진, 선배 언니와 돌아다니다 상인들의 감시를 받아야 했던 가을 추암해변, 출장길에 발견하고 오래 잊지 못했던 2월의 죽변항, 일 겸 여행 겸 주말마다 드나들던 봄의 주문진과 옥계…. 바다, 하면 역시 동해라는 것에 맞장구치는 남편과 연애를 시작한 곳도, 세 살배기 아들과 떠났던 첫 가족 여행도 전부 동쪽 바다였다.

작년 겨울엔 부산엘 갔다. 소개 받은 한의원에 약을 지으러 가는 우울한 목적 때문이었지만, 우리 세 식구에 남편 친구들이 합세한 어엿한 여행길. 광안리 근처에 묵었던지라 밤이고 낮이고 해변 산책을 했다. 바다를 좋아하게 된 건 아마도 비밀의 무게를 알고 나서부터가 아니었을까. 비밀을 많이 갖고 싶었던 어린 시절엔 여기저기 쑤시고 다닐 수 있고, 언제든 다정하게 안아주는 강이 좋았지만 말이다. 바닷가를 걷고 있는 것만으로도 홀가분해지는 것을 그 시절엔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었겠지.

뭐든 다 털어놓을 수 있어서인가, 바닷가에선 아무것도 필요가 없다. 아이도, 어른도 그저 바다를 즐길 뿐. 먼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고, 바람을 맞으며 걷고, 쓸려온 조개껍데기들을 줍고, 공연히 파도 앞에서 종종 걸음을 치거나 멀리 돌멩이를 던져보는 일들을 한다. 지난가을을 지냈던 제주의 세화해변이 그리운 것도 바닷가에서는 빈 생수통 주워 노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리라.

 

 

군자불기를 읽으며

그렇다고 매번 바다에 갈 수 있나. 겨울은 마음도, 가계도 긴축이니. 기름보일러 돌아가는 소리도 무섭지만, 땔감 없어진 빈자리도 무섭다. 몸도 그걸 아는지 잔뜩 지방을 그러모으는 모양이지만…. 어쩔 수 없다. 겨울이니까. 묵은 호두를 잔뜩 까면서 긴 밤을 보내거나, 괜히 칠 줄도 모르는 기타를 꺼내 퉁겨보거나, 추위에 엄마와 형제를 잃은 강아지들을 며칠 맡아주거나 하면서 그때그때 시간을 보낸다.

해가 일찍 지니 하루가 참 금방이다 싶으면서도, 한 달 지나는 게 엄청 더디게 느껴지는 계절. 그러다 2월이 온다. 어제는 봄날이었다가, 오늘은 겨울이 되는 요변덕의 날씨도 그렇지만 까치설날, 그냥 설날 다 지나도 여전히 새해 느낌이 나지 않는다. 시동만 오래 걸어놓고 출발하지 못하는 듯 공연히 울렁울렁한 기분. 늙어서 시를 쓰게 된다면 평생의 2월을 읊어보리라. 이도저도 아닌, 오도 가도 못하는 2월의 어느 날엔 댐이라도 나가 물 구경을 한다. 흙색이거나 먹색인 산속에 담긴 푸른 데칼코마니.

하릴없이 텅 빈 공원을 걷다가 낮은 지형으로 소리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잠시 쉬었다. 바람을 맞고, 물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어디 멀리 나갔다 온 것 같아서 좋다. 집에 돌아와선 따뜻한 차를 마시며 글씨를 본다. 작년에 벽 하나를 깨끗이 비우고 선물 받은 글씨를 붙여놓았었다. 군자불기(君子不器). 군자는 정해진 용도로 쓰이는 그릇과 같지 않으니 두루 통하고 덕이 많은 자가 되라는 말이다.

군자는 언감생심이지만, 엄마로서 불기라는 말이 깊게 와 닿았다. 마감 넘긴 원고를 쓰다 말고 밥상을 차리고, 아이가 열이 오르면 같이 잠을 설치고, 요리나 육아서를 읽다 말고 시 한 편이 그리워지는 주부의 시간들…. 다음 달이면 녀석도 어느덧 초등학생이 된다. 앞으로도 부지런히 ‘엄마불기’해야지. 불기를 하다가 때로 욕심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지만, 그럴 땐 또 한 번 저 먼 바다로 달려가고 싶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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